아들이 다음 달에 결혼식을 올린다. 이미 알래스카에서 혼인신고를 하고 유부남으로 산 지 일 년. 한국 결혼식을 조금 늦게 하는 셈이다. 선 시엄마 되기, 후 아들 결혼식. 뭐 이런 순서랄까.
결혼식 준비에 내가 크게 신경 쓸 건 없었다. 다만 결혼식날 혼주 한복을 입을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결단이 남았다. 나는 사돈(미국분)과 함께 한복을 입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드레스를 입겠다고 하신다.
자연스레 나도 한복 대신 양장을 하기로 했다. 처음엔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려고 했다. 옷에 맞는 구두도 마련해야 할 것이고. 근데 결혼식 날 외엔 입을 일이 없는 조합이 아닌가. 조금씩 머리가 아파졌다.
자식을 결혼시킨 친구들이 있는 언니가 알려주길 요즘엔 혼주 드레스를 빌려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 그런 방법이 있었군. 그때부터 인터넷 검색에 들어갔다. '혼주 양장' 또는 '혼주 드레스'로 찾아보니 인기가 좋은 업체가 몇 있었다.
후기를 열심히 읽어보고 그중 두 곳을 골라 피팅 날짜를 예약했다. 어느새 그날. 보통 예비 신랑신부가 양측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피팅을 지켜보고 결정한다고 한다. 난 지켜봐 줄 아이들이 한국에 없다고요(시무룩). 그래서 언니와 함께 갔다.
첫 번째 업체. 점잖은 실크 스타일보단 화려한 느낌의 파티복 스타일에 주력하는 곳이다. 홈페이지 사진을 보고 미리 드레스 다섯 벌을 점찍어 두었다. 하늘하늘한 천에 반짝이는 비즈들. 어머나 이런 공주옷은 평생 처음 입어본다! "세상에 옷이 날개다, 얘! 진짜 예쁘다!" 언니는 연신 감탄을 했다.
중년의 한국 여자에게 맞을까 싶은 드레스였지만 막상 입어보니 웬걸, 되게 잘 어울려. 나는 하체비만형이라 상체엔 비교적 살이 없는 편. 하체의 단점을 길고 풍성한 치마가 가려주었다. 실제의 나보다 훨씬 날씬해 보이는 효과. 음 마음에 든다.
내가 고른 것들 외에 직원이 다른 드레스도 두어 벌 추천했다. 피팅룸 한가운데 올라서게 만든 동그란 자리는 일종의 무대였다. 거기에 서서 옷을 갈아입고 커튼을 쫙 열 때마다 언니와 직원은 칭찬을 퍼부었다. 언니는 또한 옷마다 사진을 찍어주었다.
완전 공주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살짝 스타가 된 느낌? 삼십 년쯤은 젊어진 기분? 이거 너무 재밌다! 설사 여기서 드레스를 대여하지 않는다 해도 피팅비가 전혀 아깝지 않았다. (드레스 대여비에 피팅비가 포함된다)
사진 출처: 로엘드레스 홈페이지
우리는 최종적으로 두 개를 골랐다. 하나는 투명한 비즈가 가득 달리고 몸에 달라붙는 일자형의 핑크 드레스. 엄청 화려한 파티복이다. 다른 하나는 카라가 있고 레이스로 전신을 휘감는 A라인의 민트색 드레스. 단정하고 젊어 보이는 느낌이다.
언니는 딸 둘에게 사진을 보내고 어떤 게 낫냐고 물어보았다. 나도 남편과 아들이 있는 단톡방에 사진을 올렸다. 조카들과 부자 모두 핑크 드레스에 몰표를 주었다. 키가 크고 날씬해 보인다는 이유. 아들 결혼식에서 엄마가 파티복을 입고 확 튀어봐? 언니와 나는 그 모습을 상상하며 깔깔 웃었다.
그러나 선택은 일렀다. 우리에겐 아직 두 번째 업체가 남았다. 피팅하는데 배가 나오면 안 되었기에 점심은 카페에서 간단히 먹기로 했다. 언니는 샌드위치를 시켰고 나는 조각 케이크를 먹었다. 열량으로 힘을 내자는 전략.
혼주 드레스 대여 업체 중 고가 라인이라는 이곳. 매장 안에 들어서자 고품격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한눈에도 걸어놓은 옷의 디자인과 재질이 고급이었다.
여긴 직원이 아니라 원장님이 직접 응대를 했다. 알록달록한 원피스를 입은 마르고 훤칠한 중년 여성이었다. 얼마나 즐거울지 나는 시작부터 기대감이 뿜뿜 솟았다. 그녀는 내가 골라둔 옷과 자신이 추천하는 옷을 가져왔다.
먼저 일자로 똑 떨어지는 핑크색 실크 드레스. 그 위에 레이스 볼레로를 걸쳤다. 우아함의 극치인걸? 고급지고 아름답다. 원장님의 원픽이었다. 단 이미 화려한 파티복에 맛을 들인 나에겐 너무 점잖아 보이는 게 흠이라면 흠.
사진 출처: 리휴 홈페이지
다음 건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레이스로 뒤덮인 A라인 원피스. 색깔은 역시 핑크. 사랑스러움, 화려함, 고급짐이 조화를 이루었다. 게다가 치마 길이가 발목 끝에 딱 떨어져 걸어 다니기 편했다. 입자마자 찌르르 전기가 왔다. 바로 이게 내 옷이닷!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직원들과언니도 정말 예쁘다고 찰떡같이 어울린다고 입을 모았다.
그럼에도 원장님은 보라색, 민트색의 드레스를 더 입어보라고 권했다. 다른 스타일을 여러 벌 입어보아야 가장 마음에 드는 옷을 확신할 수 있다는 지론이었다. 드레스는 하나같이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확실히 이전 업체보다 옷과 서비스의 수준이 높았다.
그녀의 말대로 핑크색 레이스 드레스가 나에게 베스트라는 걸 재확인했다. 이분 참 노련하고 실력이 있네. 업체 측(원장님)과 관객(언니), 그리고 당사자(나)까지 완벽하게 만족하는 선택. 나는 대여비를 흔쾌히 지불했다. 이전 업체보다 조금 비쌌지만 충분히 그 값을 했으니까.
사실 드레스를 고르는 날이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다. 옆에서 이쁘다고들 추켜세우고 나도 내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파티에 막 뛰어가야 할 것 같고. 캬캬캬. 오십 넘은 (특히 한국!) 여자가 언제 멋진 드레스를 실컷 입어보겠냔 말이다. 결혼식 당일에도 정말 신날 것 같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나도 아름다운 조연이 될 테니까. 만약 한복을 입기로 했다면 그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느낌이었겠지.
그러고 보니 나는 인생에서 큰일이닥칠 때마다 숙제하는 기분으로 살지 않았나 싶다. 잘 해내야 하는, 잘 마쳐야 하는 숙제. 과정을 즐기기보단결과를 걱정하는 숙제. 물론 여유가 없었던 게 내 탓만은 아니다. 기댈 곳 없이 스스로를 지키고 버티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순간순간을 최대한 즐겼다면 좋았을 것을.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것. 이제는 그리 살아도 되겠지. 그렇게 살아야지.
그리고 자식 결혼을 앞둔 엄마들에게 강력히 추천합니다. 한복 대신 드레스를 입어 보세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신세계를 맛볼 것이라오. 내 장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