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고치려면
<2017년 11월 15일>
화구통을 메고 수강실로 들어섰을 때만 해도 오늘이 민화 수업 날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낯선 남자 한 분이 나를 보고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어, 민화반에는 남자가 하나도 없는데. 순간 깨달았다. 여기 민화반이 아니구나. 이어서 머리를 스치는 생각. 오늘 목요일이 아니구나!
어처구니없게도 수요일인 오늘, 나는 목요일인 줄 알고 열심히 동사무소로 간 것이다.
아, 나 왜 이러지?!
이건 분명 잠을 못 자서 정신이 없었던 거야. 요즘 불청객 불면증이 다시 찾아왔다. 지난주 내내 하루에 서너 시간밖에 자지 못했고 급기야 그저께는 단 10분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말 그대로 꼬박 밤을 새웠다. 전형적인 불면증이다. 지겹고도 익숙한 그 느낌. 졸리긴 한데 절대 의식이 잠들지 못하는 것. 내 불면증의 특징은 처음부터 잠이 들지 않는 것이다. 물론 자다가 중간에 깨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면 오히려 다행이고, 처음부터 잠 자체가 들지 않는다. 새벽 2시, 3시가 넘어도 잠이 들지 않는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뒤늦게라도 잠들어 서너 시간은 자지만 아침까지 잠이 안 드는 경우도 있다. 그저께가 그랬다.
유방암 수술을 받고 치료를 하면서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항암제, 항호르몬제가 다 불면증을 불러온다. 수면제조차 듣지 않아서 정신과에서 따로 약을 처방받아먹었다. 약 6년 간을 그렇게 약에 의지해 잠을 잤다. 이후 항호르몬제인 타목시펜을 끊었는데도 불면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약을 먹고 잘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 2년에 걸쳐 약을 줄여왔다. 얼마 전 드디어 약 없이도 자는데 성공. 이제야말로 아무런 약 없이 살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던 중, 뒤통수를 치듯이 이 친구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따져 보니 약 없이 정상적으로 잔 기간은 겨우 3주였다. 세상에, 겨우 3주라니! 이후 유방암 치료로 인한 강제적인 갱년기 말고 '진짜 갱년기'가 찾아왔다. 아마도 이 진짜 갱년기 때문에 다시 불면이 시작된 것 같다. 정말 '지랄 총량의 법칙' 마냥 '고통 총량의 법칙'이 있는 게 분명하다. 진짜 갱년기가 되었으니 다시 겪을 건 다 겪어라! 인생 진짜 욕 나온다. 에이 @#$%^&*~
강제 갱년기 동안 계속된 불면증은 약으로 버티었다. 그때는 수면제, 운동, 멜라토닌 등등 무엇을 해도 효과가 없었다. 오직 정신과 처방약만 들었기에 그걸 먹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또다시 약 먹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그걸 어떻게 끊었는데! 잠 못 자는 긴 밤에 나는 궁리를 했다. 이걸 어쩔 것이냐. 불면증의 무서움은 단순히 잠을 못 자서 피곤한 데 있지 않다. 물론 잠을 못 자면 몸은 너무나 힘들다. 눈에 모래를 한 움큼 뿌린 듯 뻑뻑하고 눈두덩은 화난 듯 부어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입 안도 경직되고 뭉근한 통증이 느껴진다. 머리를 누르는 듯한 두통도 생긴다. 종일 피곤하고 정신이 멍해진다. 글 따위를 쓰고자 하는 욕구도 안 생긴다. 짜증이 솟고 만사가 귀찮아진다.
이것들보다 더 치명적인 건 자존감이 확 떨어진다는 것. 나는 그렇더라. 내가 이걸 컨트롤할 수 없다는 걸 느끼면 자괴감이 든다. 육체적인 고통에 더해서 정신적인 고통이 추가된다. 그리고 후자가 더 강력하다. 그 메커니즘은 이렇다.
밤 11시쯤 되면 슬슬 잠이 오고 피곤하다. 이제는 자야지 하고 침대에 눕는다. 1시간, 2시간, 3시간이 지나도 잠이 안 든다. 자려고 애를 쓸수록 잠은 오지 않는다. 자야지 자야 해,라고 되뇔수록 자꾸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어느덧 잠들지 않는 의식은 생각들로 가득 채워진다. 잠이 안 드니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을 하니 또 잠이 안 든다. 그렇게 아침이 된다. 그러다 이렇게 불면증에 발목 잡히는구나. 이걸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구나.라는 절망감에 빠진다. 피곤함보다 이 절망감이 다음날을 더 괴롭게 만든다. 그 결과 다음날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지고 멍하니 소파에 앉아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육체적인 고통은 어쩔 수 없지만 정신적인 고통에는 빠지지 말자.
일단 불면에서 벗어날 여러 가지 노력을 하되, 소용이 없다면 그냥 받아들이자.
불면과 싸우지 말고 그냥 친구가 되자.
달갑지도 않고 전혀 함께하고 싶지 않은 녀석이지만 어쩔 수 없이 데려가야 할 친구 말이다.
잠이 오길 기도하며 누워있지 말고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기로 했다. 할 일이야 많다.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영어 공부를 할 수도 있고 팟캐스트로 강의를 들을 수도 있다. 물론 글을 쓸 수도 있다. 그렇게 2, 3시쯤까지 시간을 보내다 다시 잠을 청해 본다. 운이 좋으면 조금이라도 잘 수 있겠지. 전혀 못 잔다면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며칠 버티면 그중 하루 정도는 잠을 자겠지.
어제가 그랬다. 지난주 내내 평균 세 시간 정도를 잤는데 그저께는 정말 하나도 못 잤다. 예전 같으면 자괴감에 시달리며 아침부터 침울해서 아무것에도 집중을 못 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겠지. 오늘 밤 또 못 자면 어쩌지?라는 걱정을 하면서. 하지만 어제는 물론 아침부터 피곤했지만 그냥 등산을 했다. 평소보다 멀리 매봉까지 다녀왔다. 조금 힘들게 운동을 해서 몸을 피곤하게 하는 게 목적이다. 역시 다녀와서는 너무나 피곤해서 점심을 먹고는 침대에 쓰러졌다. 낮잠을 자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로 낮잠을 잘 수 있으면 불면증이 아니다) 그냥 누워서 쉬었다. 그 뒤에 반찬을 만들어 저녁을 먹고 책을 읽었다. 8시쯤 되니 극도의 피곤이 몰려왔다. 졸리기도 했다.
이때다 싶어 멜라토닌 두 알을 먹고 침대에 누웠다. 또 못 자면 어쩌지 라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아니야 오늘은 조금이라도 자겠지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꿈을 꾸면서 잔 듯 안 잔 듯 10시 반까지 자다가 깨었다. 꿈에서 화장실이 가고 싶었는데 진짜 오줌이 마려웠다. 화장실을 다녀와 다시 누워서 잠이 들었다. 4시 반까지 여러 번 깨었지만 어쨌든 자기는 잤다! 성공이다. 운동이었는지 멜라토닌 때문인지 몰라도 여하튼 성공이다. 둘 다였는지도.
수면의 질은 좋지 않았지만 어쨌든 잤고, 하루 종일 자괴감에 빠지지도 않았다. 후자가 중요했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니까. 아마도 후자가 전자에 영향을 미쳤을지도 모른다.
불면과 함께할 여러 가지 노력은 다음과 같다.
운동.
멜라토닌.
아로마 테라피(라벤더 디퓨져, 라벤더 오일)
이외에도 필요하면 아예 커피를 끊어볼까 하는 생각도 있다. 원래 커피를 많이 마시지 않는 편(오전에 한 잔)이라 큰 영향은 없을 거 같아 아직은 내버려 두고 있다. 불면의 표면적인 원인은 갱년기지만 근본적인 원인이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결혼 전에는 잠을 잘 자는 편이었는데 결혼하고 임신하고 그러면서부터 잠을 잘 못 자게 되었다. 그때는 불면까지는 아니고 충분히 못 자는 정도. 그러다 유방암 수술하고 치료받으며 지독한 불면증이 되어 버렸다. 마음이 편해야 잠을 잘 자는 것은 기본일 터. 심리적으로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근본적으로 심리 치료를 받아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심리 치료에 해당하는 어떤 과정이 필요하든지.
페북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란다.
"병을 고치려면 무엇 때문에 나았는지 모를 정도로 수많은 방법을 써봐야 한다."
맞는 말씀. 무엇 때문에 나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낫기만 하면 되지.
사람마다 체질도 환경도 성격도 다르니까 누군가에게 맞는 방법이 나에게는 안 맞을 수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수많은 방법 중 나에게 먹힐 방법을 찾아 시도하기.
결국 불면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마음만은 편하게 먹기.
유방암처럼 불면증도 살살 달래 가며 데리고 살아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