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스토리 or 인생 스토리
갑작스러운 형부의 죽음과 함께 예정에 없던 여행 중단은 아이와 나를 무척이나 힘들게 했다. 애초에 꽃가마를 타고 나온 여행이 아니지 않은가. 얼마나 어렵게 나온 여행인데 이렇게 끝나야 하다니. 사실 폴란드에서 우리의 여행은 절정이었다. 한창 여행의 깊은 맛을 누리던 시간이었다. 당연히 아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나 할 수 없이 여행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순간 나는 여행자에서 생활인으로 변신해 언니에게로 달려갔다. 충격에 빠져 있는 언니를 대신해 이런저런 일을 돌봐주고 돌아오니 열흘이 지났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원래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했던가? 더 심각한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돌아오고 약 한 달이 지난 10월, 나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자신이 암 환자가 되리라고 생각해본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가족이나 지인들 중 암 환자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일은 상상도 못 했다. 여행자에서 생활인으로 다시 암 환자로, 변신 로봇도 아닌 주제에 나는 잘도 변신해야만 했다. 안전벨트가 고장 난 롤러코스터를 타고 끝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여행 정리고 뭐고 정신없이 수술을 받았다. 수술 뒤에는 항암 치료, 방사선 치료, 호르몬 치료가 줄을 이었다.
그런데 불행과 행운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붙어 있을 줄이야. 병을 앓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혼자 살아본 6개월과 이어진 아내의 암 진단은 남편을 달라지게 만들었다. 그는 힘겨운 치료과정을 함께 겪으며 내 곁을 지켰다. 비로소 ‘남의 편’이 진짜 ‘내 편’이 되었다. 그와 함께 나도 달라졌다. 가슴의 일부분을 도려내었지만 예전처럼 가슴속에 찬바람이 불지는 않았다. 우리의 평행선이 드디어 만났다. 이제 남편은 내 여행 인생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내가 어디를 여행하든 적극 격려하고 지지해준다.
치료가 얼추 끝나가고 항암 때문에 박박 밀었던 머리가 2센티미터 정도 자랐을 즈음, 난 결심을 했다. 소중한 내 여행 경험을 이렇게 흘려버릴 수는 없다고. 원래 쇼트커트를 즐기는 사람처럼 짧은 머리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책 쓰기 교실을 찾아갔다. 그리고 6개월 동안 초고를 완성했다.
실은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우리의 여행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여행 내내 아무리 피곤해도 글쓰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때 같이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 중에서 수강 기간인 6개월 안에 초고를 끝낸 사람은 나뿐이었다. 안 그래도 수술과 치료 때문에 늦어졌고 더 이상 미뤄지면 아예 여행기를 내지 못할 거라는 절박함이 나를 이끌었다. 그랬다. 난 누구보다 절실하고 절박했다.
여러 출판사에 투고를 했는데 운 좋게도 몇 군데서 연락이 왔다. 그때만 해도 청소년 아들과 엄마가 함께한 여행기는 매우 드물었다. 아마 독특한 콘셉트가 눈길을 끌었던 모양이다. 그중 인연이 닿는 출판사와 계약을 했고 2014년, 드디어 공식적인 첫 책 <고등학교 대신 지구별 여행>이 출간되었다. 글은 엄마가 썼고, 사진은 아들이 찍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첫 책은 따로 있다. 그전에 <사랑을 말하기에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라는 공저를 출판했더랬다. 이 책은 백천 문화재단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배포하는 비매품이다. 환자와 그 가족들의 편지글을 모아서 만들었다. 서점에는 판매되지 않는 비공식적인 책이라 하겠다.
그 와중에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명색이 암 환자니 체력적으로 무리가 되는 먼 곳으로는 갈 수가 없었다. 마침 중국을 한 번도 안 가봤으니 가까운 칭다오에 가기로 했다. 그게 2013년 봄이다. 아프리카까지 섭렵한 우리에게 칭다오는 너무 싱거운 여행지였지만 세 식구가 다 같이 여행한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2014년 1월에 책이 나오고, 9월에 아들은 알래스카 대학에 들어갔다. 대안학교 출신인 데다 고등학교 과정 대신 세계여행을 했으니 평범한 이력은 아니었다. 아예 해외로 눈을 돌려 아이가 원하는 야생 생물학 관련학과가 있는 대학을 찾았다. 그곳이 알래스카 대학이다.
하나뿐인 자식이 독립을 하자 나도 독립 준비에 나섰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늘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영어였다. 영어회화가 능숙한 아들과는 달리 나는 영어가 서툴렀다. 보통의 중년들처럼 중・고등학교 이후에는 영어를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아이와 같이 다닐 때는 별다른 불편이 없었지만 이제부터는 사정이 달라질 터, 자력갱생의 시기가 온 것이다. 물론 영어가 능숙하지 않다고 해서 여행을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지. 특히 여행지에서 사람 만나는 재미를 제일로 치는 나 같은 여행자에게 유용한 통역사가 사라지는 사태는 매우 심각한 불편을 초래하겠지.
그해 2014년부터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라기보다는 말하기 연습이다. 2014년을 ‘영어 습득의 해’로 정하고 영어에만 매달렸다. 집에서 7개월 동안 기초를 다진 뒤 10월에 필리핀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처음에는 10주를 계획하고 갔지만 8주 만에 돌아왔다. 역시나 환자 체력이 학원 생활을 버텨내지 못한 탓이다. 그 해는 하루 평균 3~4시간을 영어 연습에 올인했다. 나는 여전히 여행을 다닐 테고 여행이 인생의 낙인데, 가장 유용한 도구인 영어를 잘 다룰 수 있어야 했다. 역시 모든 일의 동력은 절박함이다.
여전히 나는 암 환자로, 그리고 여행자로 잘 살고 있다.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약을 먹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5년은 세계여행 이후 가장 여러 번 여행을 다닌 해였다. 필리핀, 일본, 대만, 베트남, 모두 네 나라를 다녀왔다. 미리 계획을 했던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리 되었다.
필리핀은 어학연수 시절, 여행을 전혀 못한 게 아쉬워서 다시 갔다. 일본은 아들 성화에 떠밀려 다녀왔다. 여름방학에 집에 온 아들이 일본으로 다 같이 가족여행을 가자는 것이었다. 아직 한 번도 일본에 가보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대만은 36년 만에 만난 어릴 적 친구랑 뜻이 맞아 같이 갔다. 늘 가족 하고만 다니다가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한 여행이었다. 베트남은 오롯이 나 혼자만의 여행을 하고 싶어서 갔다. 참, 핑계 없는 무덤 없다더니 핑계 없는 여행도 없네.
2016년 역시 2015년 못지않았다. 지난 세계여행 때 폴란드에서 동유럽여행을 중단한 이후, 내내 별러왔던 유럽을 다시 갔다. 계획이 늘 그러하듯, 처음에는 매우 창대했다. 무비자 3개월 동안 남유럽부터 북유럽까지 유럽 전체를 돌아보자고 결심했지만, 역시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부족한 경비와 부실한 체력이 문제였다. 때문에 가능한 이동을 적게 하는 단순한 루트를 만들었다. 파격적으로 한 도시에서 한 달을 지내기로 말이다. 결과적으로는 87일 동안 스페인 세비야, 프랑스 리옹, 독일 드레스덴에서 20여 일씩 머물렀다. 그 외에 프랑스 안시와 파리, 독일 로맨틱 가도와 베를린, 체코 프라하와 체스키 크룸로프를 며칠씩 돌아보았다.
2017년에는 가볍게 인도네시아를 다녀왔다. 친구가 사는 자카르타를 거쳐 욕야카르타(족자), 발리에서 모두 20일을 보냈다. 여름내 이 책의 초고를 쓰고 잠시 한숨 돌리자는 의도였다. 머리를 식히고 쉬는 게 목적이었지만 ‘잠 못 이루는 시애틀’도 아니고 ‘잠 못 이루는 인도네시아’ 일 줄이야. 새벽 4시에 울려 퍼지는 모스크 기도 소리와 트럭이 달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에어컨, 밤새 짖어대는 개소리로 인해 내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집에 돌아와서야 숙면이 가능했다. 여행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 품목이다. 덕분에 잘 자는 몸을 만들기 위해 꾸준히 운동하고 있다.
여행의 동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누구에게는 현실 도피일 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탐색일 수도 있다. 나는 현실 도피이자 탈출 욕구가 100%였고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도 100%였다. 도합 200%니 어찌 떠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요즘에는 탈출 욕구는 거의 없어지고 탐색 욕구가 200%다. 명리학을 공부하는 친구가 사주를 보더니 나한테 역마살이 있단다. 흐르는 물이어서 흘러 다녀야 하는 팔자란다. 그래서일까, 도로가 무서워 운전도 꺼리고 물이 무서워 수영도 못하는 겁쟁이가 여행에서만큼은 딴사람처럼 대범해진다. 매번 새로운 시도를 하고 매번 낯선 곳으로 떠난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