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직 늦지 않았다, 자유여행

첫 여행에서 세계여행까지

by 소율

처음 여행을 꿈꾸었을 때


스물아홉 살 여름,

‘여행’이란 단어는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 처음 한비야의 여행기를 읽었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시리즈. 모험으로 가득한 에피소드보다 더 나를 뒤흔든 건 “아,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거였어!”라는 발견이었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비슷비슷한 삶의 방식과는 다른, 자기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 그 방법이 여행일 수 있다는 것. 누군가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


번개와도 같은 충격은 가슴속에 불씨 하나를 만들어냈다. 누군가 했다면 나 역시 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간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무언가 꼬물꼬물하고 부드러운 것이 발목에 매달렸다. 나는 얼른 말캉한 그것을 품에 안았다. 당시 1996년 8월, 7개월 된 아들을 둔 엄마이자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새댁, 그녀가 나였다.


가슴속에 조그만 불씨 하나가 생겼다고 해서 곧바로 인생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평범하게 아이를 키우며 사는 삶이라는 것도 결코 만만하지는 않았으니까. 사실 ‘평범하게’를 유지하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뽈뽈 기어 다니던 아들이 두 돌이 되자 나는 다시 직장생활을 시도했다. 하지만 육아와 살림, 회사생활까지 1인 3역을 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역부족이었다. 육아와 살림에 관심이 없는 남편을 변화시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친정이고 시댁이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전쟁 같은 몇 개월을 보낸 뒤 결론을 내렸다. ‘직장을 그만두겠어!’ 결혼 전에는 단 한 번도 전업주부가 되리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늘 계획을 벗어나는 일 투성이다. 지지고 볶고 울고 웃으며 사는 동안 아이는 씩씩하게 자랐고 나도 착실히 나이를 먹어갔다. 그러는 사이 그토록 강렬했던 스물아홉 때의 충격도 다 잊혀 갔다.


다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사라져 버린 ‘여행’이란 단어가 다시 찾아왔다. 마흔이었다. 사는 게 답답했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 열망은 꺼진 줄만 알았던 불씨를 되살려냈다. 여행, 다시는 그 귀한 불씨를 꺼트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참새 방앗간처럼 인터넷 여행 카페를 드나들었다. 사람들이 준비했던 과정과 여행 후기를 살펴보니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저 정도라면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 복사본.jpg


2007년, 아이는 열두 살, 내 발목 대신 손을 잡아줄 나이였다. 2월 겨울방학에 아이와 둘이서 하는 2주 정도의 태국여행을 계획했다. 생애 첫 해외여행이다. 그러나 곧 남편의 반대에 부딪혔다. 한 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 없는 아내와 아들이 걱정되어 둘만 보낼 수는 없다는 거였다. 다시 남편을 포함해 세 식구가 같이 가는 걸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남편의 일정에 맞추다 보니 2주일이 5일로 줄어들었다. 그것도 3박 5일. 애초에 아들과 둘만의 여행을 계획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빼도 박도 못하는 직장인 남편과 함께 가려면 길어야 삼사일. 요즘처럼 마음대로 휴가를 쓸 수 없는 시절이었다. 여행에 관한 한 처음부터 통이 컸던 나는 고작 삼사일의 여행이 마뜩지 않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 처음이니까 욕심을 줄이자 생각하고 여행 준비에 들어갔다. 여행 카페를 참조해서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하고 일정을 짰다. 예상대로 여행은 순조로웠고 나는 자신감을 얻었다. 남편은 아내가 첫 여행을 무사히 해내는 걸 보자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여행 마지막 날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다음부턴 둘만 가도 되겠다.” 당연하지.


아들과 둘이서 세계여행


그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부터 나는 다음 여행 계획을 짰다. 6개월 뒤 여름방학. 아이와 둘이서 3주 동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돌았다. 이때는 각자 자기 배낭을 메고 본격적인 배낭여행에 돌입했다. 12년 동안 짊어진 주부 자리 대신 배낭을 짊어지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시간은 너무나 달콤했다. 초등 5학년인 아들은 불평 없이 잘 먹고 잘 자고 잘 걸었다. 이 녀석, 엄마의 여행 유전자를 물려받은 게 틀림없어. 그만하면 최고의 여행 파트너였다. 자신감이 하늘까지 올라간 나는 이제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시 새로운 계획이 떠올랐다. ‘그래, 앞으로 1년에 한 달씩 여행을 다니자. 그렇게 오대양 육대주를 모두 밟아보는 거야!’ 아내, 엄마, 며느리 외에 여행자라는 신분을 얻고 나니 사는 게 열 배쯤은 신이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 일주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릴 적 읽었던 <80일간의 세계 일주> 말고, 진짜로 세계 일주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저 막연한 꿈이 아니라 실제로 1년, 2년씩 지구를 한 바퀴 도는 여행.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하고 있었다. 옳거니, 해마다 한 달씩 다닐 거면 아예 1년을 몰아서 다녀보자, 안 될 건 뭐야? 이미 여행 맛을 알아버린 아들도 대찬성이었다.


그 뒤로부터 만 3년 뒤인 2011년, 우리는 세계여행의 첫 목적지, 아프리카로 떠났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왕자와 공주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끝나는 동화의 해피엔딩처럼 들린다.


“세상에, 가는 사람도 대단하지만 보내주는 남편이 더 멋지네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했지만 현실은 그리 아름답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는 날 나는 착잡하고 괴로웠다. 우리의 멋진 여행 계획과는 별도로, 나와 남편의 관계는 항상 평행선이었다. 그는 효자 노릇, 호인 노릇에 충실했지만 내게는 ‘내 편’ 아닌 ‘남의 편’ 같았다. 남편은 여행을 반대했고 떠나려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드디어 출발 3개월 전 남아공행 비행기 표를 예약하자 마침내 그는 이 여행을 받아들였다.


나는 떠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사는 게 답답했다. 그렇다고 불량주부였냐 하면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너무도 살뜰하게 살림을 하고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살면 살수록 내 인생의 주연이 아니라 조연으로 존재하는 것 같았다. 늘 가슴속에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일단 이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리고 달라지고 싶었다. 그것도 180도로 완전히!


내 뒤에서 사람들은 팔자가 좋아서 세계여행씩이나 간다고들 수군거렸지만, 사실 팔자가 그리 좋았다면 굳이 안락한 집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을 게다. 여행은 팔자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팔자 궂은 사람들이 떠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1화 사진2.jpg


처음에 우리는 기세 좋게 1년간의 세계 일주를 계획했다. 여행을 위해 아들은 학교를 중단해야 했고 최대로 낼 수 있는 시간은 1년이었다. 준비를 하다 보니 길어 보이는 1년이 그리 넉넉한 시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1년 동안 전 세계를 돌려면 굉장히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나는 천천히 여유롭게 다니는 여행을 원했다. 우리가 가진 경비 역시 세계 일주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여행경비는 내가 3년 동안 악착같이 생활비를 아껴 모은 적금이었다. 다른 세계 일주 여행자의 딱 절반 금액이다. 그걸로 둘이서 6개월을 버틸지 7개월을 버틸지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무조건 아끼고 아껴야 하는 짠돌이 여행일 수밖에 없었다.


하여 계획은 수정되었다. 지구 한 바퀴를 다 돌기는 못하겠고 남아공에서 이집트까지 아프리카를 종단하기, 그다음은 중동을 거쳐 아시아를 돌기. 대략 ‘세계 반주’라고나 할까. 사실 ‘돈 떨어질 때까지 최대한 다녀보자’라는 게 최종 계획이었다. 돌아오는 날짜는 정하지 않았고 돌아오는 비행기 표 또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동남아시아밖에 안 가본 배낭여행 초보가 아프리카를, 그것도 순전히 육로로 이동하는 고난도의 여행을 하자니 고생이 말도 못 하였다. 덕분에 단박에 배낭여행 능력이 수직 상승했지만 말이다. 우리는 남아공, 스와질란드,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탄자니아까지, 그다음엔 태국으로 건너가 네팔과 미얀마를 다녀왔고 폴란드에서 여행이 끝났다.


원래는 폴란드에서 시작해 동유럽 지역을 아래로 쭉 내려가는 일정이었는데 늘 그렇듯, 여행도 인생도 계획대로 굴러가는 것이 아닌지라, 느닷없이 집안에 큰일이 생겨 돌아오게 되었다. 형부가 돌아가신 것이다. 결국 총 163일, 4월에 출발해 9월에 돌아왔으니 약 6개월에 걸친 세계여행이었다. 이때가 내 나이 마흔넷, 아들은 열여섯이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