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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율 Jun 29. 2018

흰머리 휘날리며, 긴머리 휘날리며

머리카락으로 나이를 먹었다

<2017년 10월 24일>


11-3번 버스안.
길이 여전히 밀리고 있었다. 예약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도착할 것 같았다. 나는 늦는다는 문자를 보내놓고 읽던 책을 탁 덮었다. 그리고 동시에 결심했다.

 '다시는 이 짓을 하지 않겠어!'

'이 짓'이란 머리카락을 염색하러 가는 일을 말한다. 헤나 염색을 하러 가던 길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천연 헤나로 머리를 염색해왔다. 처음엔 인터넷으로 헤나를 주문해서 집에서 염색을 했다. 몇 년 전부터는 동네 미용실에 헤나를 가져가 염색만 해달라고 했다. 다행이 착한 미용실 주인은 수고비만 받고 흔쾌히 해주었다. 그러나 점점 길이가 길어지자 동네 미용실에서 하는 게 성에 차질 않았다. 

일반 화학 염색약보다 헤나는 사용하기가 번거롭다. 물에 개는데 시간도 걸리고 바르기도 훨씬 힘들다. 바르고 나서도 두세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화학염색처럼 20분 정도가 아니라 두세 시간을 놓아 두어야 염색이 잘 된다. 그러다 보니 혼자 일하는 미용실 원장님, 나중에는 헤나를 제대로 개지도 않고 뻑뻑하게 만들어 손으로 쳐덕쳐덕 대충 발라준다.  사실 해주는 것만도 감사할 지경이라 제대로 해달라고 요구할 형편이 못 되었다. 어쩌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그후로는 헤나염색 전문숍으로 가고 있다. 숍에서 파는 헤나를 사면 염색을 해주는 시스템이다. 몇 년을 그렇게 염색을 해왔다. 헤나는 전혀 몸에 해롭지 않고 머리결도 한결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 헤나염색을 하고 난 뒤의 윤기나는 오렌지 색깔을 나는 정말 사랑한다. 빨강머리가 좋다고라~^^

나는 머리가 일찍 센 편이다. 백프로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나름 진단한다. 반면 어릴 때부터 동안이라 지금도 나이보다 젊다는 소리를 듣는다. 자랑질 같지만 자랑이 아니라 타고나길 동안이다. 대학 때 중학생이냐는 소리를 들었고 남편과 연애할 때도 어린애를 데리고 술집에 왔다는 핀잔을 들었을 정도다. 그러나 누구라도 세월을 피해갈 수는 없는 법. 내가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어디로 먹어도 나이는 다 먹는다." 

나는 머리카락으로 나이를 먹었다. 머리카락 색깔로 치면 남들보다 10년은 늙었다. 누구 말마따나 얼굴이 아니어서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래서 흰머리가 아~주 많다. 몇년 전 우리 엄마가 우연히 내 머리를 보고는 기겁을 하셨더랬다. "아니, 너 왜 이리 흰머리가 많니?!" 엄마 눈에는 아직도 어려보이는 작은 딸의 뒤통수가 흰머리로 뒤덮인 것이 퍽이나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어쩌겠어요, 그것이 현실인 것을. 그 와중에도 다행인 건 주로 뒷머리와 속머리에 많다는 것. 요즘엔 앞머리도 들추면 꽤나 많아졌지만 뒷머리에 비하면 아직 양반이다. 하여 헤나 염색을 일찌기 시작했다. 

문제는 헤나숍이 그리 가깝지 않다는 데 있다. 대치동이다. 집에서부터 버스를 타고 가면 꼬박 1시간이 걸리고 길이 밀리기라도 하면 더 걸린다. 오늘은 버스를 15분이나 기다렸고 길도 무지하게 밀렸다. 특히 과천에서 양재동까지가 아주 악성 정체구간이다. 요즘 안 그래도 속이 안 좋아서인지 느글느글 하기까지 했다.  순간, '에라 내가 이 짓 그만 하고 만다.' 하는 억하심정이 들었다.

이노무 염색을 하려면 미리 날을 잡아야 한다. 대치동까지 왕복 최소 2시간에다 염색하는데 3시간.  최소 5시간.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오늘도 9시 반에 집에서 나가 3시에 돌아왔다. 집에 와서 좀 쉬고 나면 어영부영 하루가 다 간다. 이짓을 한두 달에 한 번씩 하고 있다.

이렇게 염색을 할 때마다 드는 생각. 

'도대체 언제까지 염색을 해야 할까?'

그냥 흰머리로 살면 안 되나? 지난 번 8월에 염색을 할 때는 '딱 60만 되면 이놈의 염색 때려친다' 였다. 60이면 흰머리로 살아도 그리 이상하지 않겠지.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 과연 60이면 괜찮아질까? 그때쯤이면 흰머리가 자연스러워질까? 아닐 것이다. 80대인 우리 엄마 아부지도 염색을 하신다. 역시 시간이 간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이참에 그냥 흰머리를 내버려 두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더 나이들어 보이겠지. 늘 나이보다 젊어보인다는 소리에 익숙한 내가 과연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흰머리를 늘어 뜨리고도 당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이 오십이면 이제 슬슬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나이 먹어가는 게 좋다고 말하면서 흰머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모순이지. 남들보다 조금(아니 실은 많이) 흰머리가 있지만 어쩔겨. 그게 나인 걸. 그게 내 인생의 흔적인 걸.


60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지금부터 해버리자. 꼭 60까지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니잖아. 염색한 오렌지색 머리카락을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유지하기에는 시간과 에너지라는 대가가 너무 크다. 무엇보다 이제는 귀찮다. 너무 귀찮아. 그래 염색은 오늘까지.  
 
그렇다고 아직 머리를 자르고 싶지는 않다. 정성껏 몇 년 동안 길러온 긴 머리다. 어릴 때 엄마가 안 길러준 머리를 내가 나에게 길러주고 있거늘. 아직은 댕강 자르고 싶지가 않다. 나이 오십에 제법 긴 머리를 휘날리고 다니는데 다들 잘 어울린다고 말해준다. 빈 말인지 칭찬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나는 그냥 칭찬으로 받아들인다.  내 눈에는 내 머리가 맘에 드니까.^^ 
 
누군가는 "그 나이에 주책이군요."라는 말을 "어머, 머리가 가발인 줄 알았어요!" 라는 말로 대신하더라. 나보다 젊은 그녀 눈에는 '저 나이에 저러고 싶을까?' 였나 보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 안 쓴다. 나 머리 기르는데 보태준 거 없고 내가 피해준 게 없는데 무슨 상관인가. 반백으로 돌아가더라도 지금처럼 구불구불 넘실거리는 긴 머리를 날리고 싶다. 이러다 백발 마녀처럼 반백 마녀가 되려나? 하긴 강경화 장관 머리를 보면 참으로 멋있으니 나라고 멋있지 말라는 보장은 없겠지?(이게 무슨 말이냐? ㅋㅋㅋ)  

이러다 어느날 마음이 또 바뀌어서 "나 다시 오렌지 머리로 돌아갈래~~~" 할 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염색에서 벗어나 보련다.
결론, 반백 머리 한 번 해보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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