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사관후보생 시절 동고동락했던 동기들과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연합사로 발령 난 동기 덕분에 연합사 안 <드레곤 힐>에서 만나기로 했다.
출입이 자유로운 현직 군인 동기들과 달리 전역한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군인 동기 한 명과 동행해서 연합사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약 3년 만에 만난 동기였다. 힘든 훈련소 시절 희로애락을 함께 해서 그런지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지만, 서로서로 그때 그 시절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나) “오랜만이다. 잘들 지냈지?”
(동기 1) “다들 그대로다. 그대로야!”
(동기 2) “형부들이랑 애들은 잘 있지?”
우리는 서로 안부를 주고받으면서 그동안 서로 어떻게 살아왔는지 이야기하며 수다를 이어갔다. 그리고 이야기는 어느덧 후보생 시절 추억 이야기가 시작됐다.
(동기 3) “우리 훈련소 있을 때 그 취사병 덕분에 식사 시간에 뜨거운 물 대신 시원한 물 마실 수 있었던 기억나?”
(나) “맞아, 그 취사병 덕분에 훈련 나갈 때마다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었지.”
(동기 4) “맞아 맞아. 그때 생각난다.”
2005년 봄이 시작되던 어느 날, 우리는 모두 기초 군사훈련을 받는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경상북도 영천에 있는 3사관학교에서 만났다. 새싹이 파릇파릇 고개를 내밀 때 입교했는데, 훈련이 거듭되면서 전투복도 익숙해지고 전투화도 편해지더니 어느덧 뜨거운 햇살이 부담스러워지는 여름을 맞이했다.
뜨거운 햇살 아래 계속되는 야외훈련으로 우리는 점점 늘어만 가는 피로에 허덕이고 있었다. 훈련장은 과목에 따라 다르지만, 학교에서 1~5km 거리에 있었다. 그 긴 길을 우리는 군장을 하고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힘들게 걸어야만 했다. 그때 알았다. 음악이 사람을 취하게 한다는 것을.
군장을 하고 걸으며 지칠 때마다 우리는 다 함께 목이 터져라. 군가를 불렀다. 그리고 우리는 알았다. 몇 곡의 군가가 끝나면 훈련장에 도착해 있을 거라는 것을. 그래서 더 열심히 군가를 불렀던 것 같다.
(소대장) “지금부터 군가를 시작한다. 군가는 진군가, 목소리는 힘차게! 하나! 둘! 셋! 넷!”
(다함께) “높은 산 깊은 물을 박차고 나가는 후보생 진군에는 밤낮이 없다. 눌러쓴 철모 밑에 충성이 불타고 백두산까지라도 밀고나가자. 한 자루 총을 메고 굳세게 전진하는 우리의 등 뒤에 조국이 있다.”
훈련이 끝나면 어느새 전투복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목은 타들어 갔다. 모두 수통을 꺼내 아침 식사 시간에 식당에서 가져온 물을 마셨다. 전염병 예방 때문에 식당에서는 끓인 물뿐이었다. 그래서 아무리 훈련 시간이 흘러도 여름 날씨 때문에 물은 여전히 따뜻했다. 물 한 모금 마신 후 수통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이 물이 시원한 얼음물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 제발 시원한 물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사격훈련이 있는 날이었다. 훈련장으로 떠나기 전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하러 식당에 들어갔다. 식사가 끝나고 평소처럼 수통에 물을 받아 나오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나타난 취사병 한 명이 주전자를 가지고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이슬이 송골송골 맺혀있던 노란색 주전자였다.
그 취사병은 우리 분대 동기들이 들고 있는 수통을 빼앗듯이 가져가더니 수통에 들어있던 뜨거운 물을 버리고, 들고 온 주전자에 들어있던 물을 담아주었다. 시원한 물이었다.
우리는 혹시라도 들켜 혼날까 봐 기쁜 표정도 짓지 못하고 조용히 수통을 받아들고 대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격훈련은 군사훈련에서 제일 군기가 세고 강도 높은 훈련이다. 그런데 시원한 물을 숨기고 있던 우리에게 사격장 총소리는 사랑스럽게만 들렸다.
그날 이후, 매일 식사 때마다 노란색 주전자가 우리 분대 식당 테이블에 놓였다. 그리고 우리는 시원한 물을 수통에 담아 훈련장으로 향했다.
땀이 전투복을 적시고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마음은 수통에 담긴 시원한 물 덕분에 즐겁기만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주말이었다. 휴일에 여유롭게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그런데 그날 우리 테이블에는 시원한 물은 물론이고 온갖 채소와 맛있는 재료가 가득한 볶음밥에 놓여있었다.
그리고 병사 한 명이 오더니 내 앞에 반합을 놓았다. 반합 뚜껑을 열어보니 노란색 윤기가 흐르는 달걀부침과 그 위에 정성스럽게 케첩으로 그린 하트가 있었다.
반합 귀퉁이에는 곱게 접힌 종이쪽지가 보였다. 동기 한 명이 훈육 장교님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 그 쪽지를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고, 식사가 끝난 후 우리는 나무 그늘에 함께 앉아서 그 쪽지를 읽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취사병 말년병장 김 병장이라고 합니다. 몇 달 동안 훈련받으시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들었지만, 곧 장교가 되실 몸이고, 저 또한 몇 달 후면 이곳을 떠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바라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 한마디 전하지 못하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더군요. 그래서 며칠 전부터 후임을 시켜 시원한 물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취사병을 하면서 직접 개발한 특별한 요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모두 맛있게 드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미스코리아 8중대 파이팅! 언제나 응원합니다.”
쪽지 글이 끝나자 동기들이 난리가 났다. 다들 웃으며 손바닥으로 등과 어깨를 때렸다. 모두 힘들고 슬프고 무료하기까지 했던 훈련 시절이었다. 그런 나날들에 행복한 이벤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날 이후 우리 분대 식당 테이블 요리는 다른 분대와 달랐다. 시원한 물은 기본이고, 요리에 들어있는 재료가 달랐다. 볶음밥에는 더 많은 채소와 고기가 들어가고 계란후라이가 그 위에서 우리를 반겼다. 따로 튀긴 것 같은 윤기나는 닭고기 튀김, 따로 준비한 채소와 국까지, 그곳에는 귀족 식사가 따로 없었다.
우리는 시원한 물과 맛있는 음식 때문에 행복했다. 그리고 그 취사병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줄 수 있다는 즐거움을 느끼며 행복했다. 그렇게 모두에게 행복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여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내 앞을 누군가 가로막아 섰다. 바로 그 취사병이었다. 그 취사병은 내 손을 잡더니 손바닥에 쪽지 하나를 남기고 저 멀리 뛰어갔다.
“저 내일 아침에 전역합니다. 그동안 무언가를 드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드린 것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또 행복했습니다. 나중에 저 바깥세상에서 꼭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군복에 적혀있는 이름을 외우고 있으니 제가 꼭 찾아가겠습니다.”
(동기 3) “그때 정말 재미있었지. 그런데 혹시 그 취사병 정말 찾아오지 않았어?”
(동기 2) “맞아, 나도 그 취사병 생각이 가끔 나더라고. 정말 연락 같은 거 오지 않았어?”
동기들의 질문에 나는 지긋이 웃으며 물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전방부대 배치 후 3개월쯤 되던 어느 날이었다. 힘든 훈련이 끝나고 관사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친구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오랜만에 SNS에 접속했다. 인터넷 쪽지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반합 하트의 주인공. 네 그 취사병입니다. 전역하고 복학을 하니 하루하루 정신없는 날들이네요. 군인 때를 지우는데 자그마치 6개월이 걸렸네요. 가끔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소위님을 찾았습니다. 이름 말고는 어디 사시는지 나이는 몇 살인지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찾는데 한참이 걸렸답니다. SNS를 열심히 뒤져 드디어 소위님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생각도 못 했습니다. 남자친구가 있으셨네요. 남자친구 사진을 보며 한참을 멍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소위님을 정말 좋아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어서 좋았던 것인지. 둘 다였습니다. 소위님을 정말 좋아했고, 소위님께 무언가를 드릴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전 이렇게 물러가지만, 그 추억은 잊지 않고 살아가겠습니다. 가끔 절 기억해주세요. 그리고 늘 행복하세요~.“
그때 그가 이 이야기를 볼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당당히 말하고 싶다. 나도 덕분에 즐겁고 행복했다고. 그래서 약속대로 그 고마움 잊지 않고 살아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