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 아침에 눈을 뜨니 빗물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커튼을 열고 베란다 문을 여니 ‘뚝뚝’ 봄비가 내린다.
그날 아침도 평소처럼 곤히 자는 아이를 깨우고 느긋하기만 한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대충 집 정리를 하고 세탁실에 쌓인 빨래를 색상별로 분류한다. 세탁기에 세제, 섬유유연제를 차례로 넣은 후 시작 버튼을 누른다. ‘어라? 왜 안 돌아 가지?’ 옷이 끼였는지 잘 돌아가지 않는 세탁기를 문을 다시 열었다. 빨랫감을 더 깊숙이 넣고 다시 돌린 후 잘 작동이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잠시 세탁기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빙글빙글 빙그르르 드럼 세탁기의 투명한 동그란 원이 어지럽게 돌아간다. 빙글빙글 빙그르르 쉼 없이 돌아가는 세탁기의 블랙홀 같은 원을 보며 과거의 기억으로 들어간다.
2005년 사관후보생 임관훈련을 마치고 강원도 화천 최전방 부대의 교육장교로 부임하였다. 내가 처음 보급수송대대에 부임했을 때, 부대 사람들은 여군이었던 나를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었다. 전방부대는 몇십 년 동안 남성들의 세계였다. 남자들을 위한 문화, 남자들을 위한 공간이 오랫동안 자리 잡은 곳이었다. 당연히 여자 화장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대 바깥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해야 할 정도였다.
얼마 후 행정보급관님이 병사들이 사용하던 화장실 맨 마지막 한 칸을 여성 전용 화장실로 만들어주셨다. 행정보급관님은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로 자상하신 분이었다. 시간이 흘러 생활이 익숙해지자 화장실 옆 칸에서 볼일을 보는 병사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 나 ) “옆에 누구니? ”
(병사) “소대장님이십니까?”
( 나 ) “오늘 당직 근무자가 누구지?”
(병사) “최 상병이지 말입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같이 있었던 탓에 화장실을 나오다가 샤워하고 나오던 병사들과 마주치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이미 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밖으로 걸어 나가는데, 등 뒤에서 남자들이 고막 찢어질 정도로 소리를 질러댔다.
‘여자 화장실에 남자가 들어오면 여자들이 소리치는 것처럼, 남자들도 여자가 나타나면 소리를 지르는구나.’
나는 두 손을 모아 입 앞에 대고 샤워실을 향해 외쳤다.
( 나 ) “미안해 얘들아, 아무것도 못 봤어!”
(병사들) “으악~~!!”
당직근무를 서고 나서 제대로 잠도 못 자고 훈련을 나가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잠깐 눈 붙일 곳을 찾아 헤매다가 내무실로 들어가서 문 바로 앞에 잠시 누워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불침번 근무 나가려고 옷을 갈아입던 병사가 나를 발견하고 놀라 넘어져 다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당직근무
주말이 되면 그나마 조금 번화한(?) 바로 옆 도시 춘천에 가서 바람을 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전방부대 특성상 부대 근처에서 항시 대기해야 했었다. 만약 춘천을 갔는데 비상이라도 걸리면 그날로 지옥을 맛봐야만 했다.
물론 대한민국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화천을 벗어나 춘천으로 가기 위해서는 부대장 확인을 받아야만 했지만, 가끔 몰래 춘천을 가기도 했다. 이것을 우리끼리 점프라고 했다. 처음에는 점프가 재미있었다. 일탈을 꿈꾸는 청소년처럼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언제 비상 소집 명령이 떨어질지 몰라 계속 조마조마하고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점프는 대부분 한두 번에 그쳤다.
주말이면 종종 가는 춘천, 그것이 그곳에 있을 때 유일한 나의 즐거움이었다. 춘천 지하상가를 둘러보고, 쇼핑도 하고, 사주나 타로도 보곤 했다. 그때 만난 사주, 타로를 보면서 느낀 신기함으로 나중에 명리학과 점성술을 공부하기도 했다.
최전방 부대는 외롭고 힘든 곳이었다. 친구도 가족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의 갇혀있는 삶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원도 부족해서 늘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뉴스에서 가끔 군대에서 업무 과다로 군인이 자살했다는 뉴스를 접하면 그냥 눈물이 나곤 했다. 목숨을 끊은 것은 나쁘지만 오죽하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훈련이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밤새 근무하고 바로 훈련을 나가야 하는 날이었다.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은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잠시 후 모두 완전군장에 총기까지 들고 각자 위치에 섰다.
넓은 연방장에 보급품이 보관되는 막사가 지어지고 각 막사에는 보급품을 운반해 창고를 만들었다. 수송 중대에서 이동해 온 군수용 차량도 연병장에 가득 차 있었다. 다들 분주하다. 이번 훈련은 보급품 막사를 세우고 해체 시키고, 세우고 해체 시키고를 수십 번 반복하는 훈련이었다.
(병사1) “자~ 기둥을 먼저 세웁니다.”
(병사2) “잘 잡고 있어. 무너지면 다시 해야 해”
어느덧 이곳이 내 집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군 생활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은 적응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포기라는 것을. 바쁠 때는 나 자신조차 돌아볼 정신이 없을 정도로 다른 생각을 하기 어렵다. 그러다가도 잠시 여유가 생기면 그동안 나를 끌어오던 인내조차도 지친 몸과 마음 앞에서 여린 감성으로 바뀌곤 했다. 그날도 지친 마음에 혼자 조용히 숙소 뒤쪽으로 걸어갔다. 나무 아래 걸터앉아 조금 흐느끼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가끔은 이렇게라도 감정을 쏟아내야 하는 순간도 있었다.
군대에 간다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남자들이 군대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영화처럼만 느껴졌을 뿐이다. 높은 경쟁률을 뚫고 어렵게 온 군대였지만 솔직히 왜 내가 지금 여기 있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마치 운명인 것처럼 홀린 듯이 왔다. 거기다가 처음 부임한 곳이 최전방 부대였다.
어려운 환경이었지만 무슨 일이든 잘해 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늘 어리바리하고 모자란 내가 그냥 미웠다. 그때는 그랬다. 중년이 된 지금 그때 나에게 이야기하고 싶다. 처음이기 때문에 잘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고, 그 힘든 환경 속에서 충분히 노력했고 대견하게 잘 해냈다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니 문득 매일매일 쳇바퀴처럼 돌아가던 그때가 떠올랐다. 갑자기 나 자신을 안아주고 싶어졌다. 너무 힘들고 막막했지만 잘 이겨내고 버텨냈던 나 자신이 문득 대견하게 느껴졌다.
‘띠리리리~ 띠리리링~’ 빨래가 다되었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세탁기에서 깨끗해진 하얀 블라우스를 꺼냈다. 마치 찌그러진 못난 기억의 때를 깨끗이 벗어버린 모습이 지금의 나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따뜻해졌다.
그때였다. ‘딩동~딩동~’ 벨 소리가 들렸다. 어느덧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엄마! 엄마가 사랑하는 호박이 왔어요!”라며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들이 달려와 나한테 와락 안긴다. 나는 지금 이 예쁜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어느덧 나는 누구에게도 말 못 했던 외로움의 터널을 지나 또 순간순간 소소했던 행복을 간직하고 중년이 된 지금 한 아이와 함께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는 제법 야무지고 멋진 사람이 되었다.
지금 나는 소소한 행복 속에서 행운도 찾아가면서 가족들과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너무 행복했다. 아들을 더 꼭 끌어안았다. 엄마의 낯선 모습을 아들이 이상하게 바라보다가 자기도 좋은지 나를 꼭 끌어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