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필요하다. 그러나 결별에는 늘 시간이 필요하다. 동네 지리도 모르고, 마트, 병원, 약국 등 편의시설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럴 때마다 회귀본능이 발동한다. 장을 보러 먼저 살던 동네로 향한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웬일이야? 이사 간 거 아니었어?”
나는 그냥 웃는다.
저녁 식사 후 가장 가까운 대형 할인점을 찾았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다. 빨리 이곳에 적응해야 할 텐데 아직도 길이 낯설다. 엘리베이터는 어디에 있는지, 무빙워크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주차장은 지하에 있는지 지상에 있는지. 이번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 마트는 최근에 리모델링을 해서 그나마 조금 익숙해진 동선이 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집에 일찍 들어가기는 글렀다.
리모델링이 끝난 마트는 멋지게 변했다. 잠깐 카트를 멈추고 변해버린 마트를 구경했다. 문득 신입사원 시절이 생각났다.
2008년 전역 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국내 대형 유통회사에 입사했다. 신입사원 연수를 마치고 현장 교육을 위해 배치받은 곳은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지점이었다. 보통 현장 교육을 받은 곳으로 발령받는 것이 관례였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이 지점에서 일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곳 지점 사람들은 정말 친절했다. 매너도 좋고 배려도 좋은 사람들이 많아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그런데 정식발령지는 다른 지점이었다. 그 지점은 국내 매출 1위의 위상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다른 지점으로의 발령에 아쉽고 속상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발령받은 첫날 나는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그 지점은 리모델링이 진행되고 있었다. 첫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바로 장갑을 끼고 잠바를 입고 리모델링에 투입됐다. 남편은 새벽까지 돌아오지 않는 나를 기다리며 걱정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했다.
보통 리모델링은 영업중단 기간 동안 진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이 지점은 국내 매출 1위이기 때문에 영업 중단은 회사 매출에 타격이었다. 그래서 이 지점은 영업과 리모델링을 동시에 진행한 것이다.
리모델링을 위해 우선 구역을 나눴다. 한 구역씩 리모델링을 진행했는데 리모델링을 하는 구역의 상품, 매대는 다른 구역으로 이동시켜 영업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가공식품 구역 리모델링이 진행되면 가공식품 구역 상품을 전부 빼서 카트에 옮겨 담는다. 매대, 집기는 전부 해체해서 다른 구역으로 옮겨 설치하고, 상품을 놓고 가격표를 꽂아서 다음 날부터 판매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진열한다.
이런 작업은 매일 밤 영업시간 종료 후에 해야 한다. 영업시간 중에는 판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직원들은 집에도 가지 못하고 자주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영업시간 중에 특히 손님이 많지 않은 시간에 작업했으면 했다. 온종일 일하고 밤늦게는 구역정리를 해야 했기 때문에 다들 지쳐있었다. 그러나 윗선에서는 영업시간 중에 작업하면 고객 민원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영업 종료 후에 구역이동을 고집했다. 직원들은 융통성을 발휘해 조금씩 들키지 않는 수준에서 일찍 작업을 시작하곤 했다. 우리도 좀 인간답게 살고 싶었던 것 같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신입사원이 와도 업무를 설명해 주거나 반겨주는 이가 없었다. 여자 대리 한 명은 내가 오자마자 내 전에 이 지점으로 발령이 났다가 백화점 사업부로 보내진 직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 전 신입사원 한 명이 왔었지. 그 신입사원은 선배들이 밤새워 일하고 있는데도 말도 없이 먼저 퇴근하고, 집이 가깝다고 근무 시간에 집에 다녀오기도 하더니, 결국 점장님께 말씀드려서 다른 사업부로 가더라”
나는 공황 상태였다. 솔직히 그 신입사원의 행동은 이기적이었지만 이해는 됐다. 이 상황에서 누가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심이 생길까. 그나저나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내지?
친절한 업무 인수인계를 받을 것이라는 희망은 이미 이 지구 밖 어디로 영원히 굿바이 했다. 조직에서의 나는 분위기는 좀 파악했지만, 순발력과 센스는 꽝이었다. 별다른 무기가 없었던 나는 그냥 무식하게 버티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불청객 같은 신입사원 생활이 계속됐다. 출근 첫날, 내가 꼭 있을 필요는 없었다. 있어도 도움이 되지도 않았고, 누가 상황을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군대 생각이 났다. 군대에서 훈련할 때 보급창고 천막을 만들었다가 해체했다가 하는 장면과 겹쳐졌다. 회사도 군대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비식품파트 소속이었다. 비식품파트에는 파트리더, 의류 잡화 담당, 인테리어 담당, 주거 용품 담당, 가전 담당, 일상용품 담당이 있었다. 파트리더를 포함해서 구역 철수, 재설치가 예정된 담당에게 퇴근은 불가능했다. 리더, 담당조차 그런 상황에서 아직 정식 업무도 받지 못한 나는 자리도 없이 여기저기 떠도는 신세였다. 당연히 퇴근하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냥 버틸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나는 비식품파트에서 주거 용품 담당이 되었다. 담당은 되었지만, 아직 업무도 익숙하지 않고 리모델링도 해야 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매일 어리바리한 날들을 보내며 육체적, 심리적으로 버거운 시간 들을 견디고 있었다.
그래도 즐거웠던 것은 내 담당구역에서 일하시는 이모님, 여사님들이었다. 그 판매직원분들은 보통 엄마 이모 또래 나이였다. 나는 그분들을 ‘사우님’이라고 불렀고 그분들은 나를 ‘담당님’이라고 불렀다. 그분들은 딸 같은, 조카 같은 나에게 현장에 대해 많은 것을 가르쳐주셨고 때로는 엄마같이, 이모같이 따뜻하게 챙겨주셨다.
유통회사는 업무종료 후에도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특히 재고 조사를 하거나 행사 준비를 해야 할 때면 퇴근, 귀가는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가 된다. 힘들었지만 동료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서로 도와가며 일하는 재미가 있었다.
일 끝나고 함께 술잔도 기울이던 순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마도 많은 남자가 군대 시절을 추억하면서도 절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마음과 같을 것이다.
다시 카트를 밀면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마트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떠올라 전화를 할까 하다가도 쉽게 전화기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고마운 사람들에게 연락하는 것이 왜 이리도 주저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나를 힘들게 했던 것도 사람이었고, 나를 버티게 했던 것도 사람이었다. 인생은 항상 그런 것 같다. 사람한테 상처받지만 치유해 주는 것도 사람인 것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