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우리 가족은 오랜만에 함께 길을 걸으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아들이 건널목 앞에 놓여있는 공유 전동킥보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들) “아빠, 저게 뭐야?”
(아빠) “응, 저건 전동킥보드야”
(아들) “아빠, 우리 킥보드 타보자. 재미있겠다.”
(아빠) “그럼 우리 한번 타볼까?”
남편은 앱으로 결재하고 킥보드에 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함께 킥보드를 타고 <북서울 꿈의 숲> 한 바퀴를 돌아 정문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남편) “그때도 이런 전동킥보드가 있었으면 참 좋았겠다.”
(나) “그때? 언제?”
(남편) “그때 말이야. 우리 신혼 때, 육사 아파트 살 때 말이야.”
(나) “아...”
2004년 연말 남편을 만났고 2년 반 연애 끝에 2007년 남편과 결혼을 했다. 결혼했을 때 나는 여군이었다. 덕분에 남편과 나는 육군사관학교 안에 있는 가족관사 <육사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가족관사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빈집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빈자리가 있을 때까지 한 달에서, 많게 반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우린 운이 좋았다. 입주 신청을 하고 며칠 후 바로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야호, 우리는 정말 운이 좋은 행운의 부부인가 봐!”
우리 부부는 하이파이브를 하고 신나서 담당 군무원과 함께 관사에 가보았다. 관사는 육군사관학교에서 가장 외진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1970년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18평 아파트였다.
베란다 창틀은 오래된 고동색이었고, 방은 작은 데 비해 거실과 욕실은 쓸데없이 큰 이상한 구조였다. 그곳은 비어있어서였는지 곳곳에 먼지가 가득했다. 나는 속으로는 조금 실망했지만 태연하게 말했다. 남편도 그랬으리라 생각된다.
(남편) “관사가 아담하네”
(나) “음 그렇네”
(나) “뭐 이정도면 정도면 신혼집으로 작지는 않다”
남편은 결혼자금을 모으고 몇 년 뒤 결혼하자고 했지만, 우리는 취직(?)을 하고 내가 화천에서 서울로 발령이 나자 나의 요구로 바로 결혼하게 되면서 조금이라도 절약해 보고자 관사를 선택했다. 무리하지 않고 관사에 들어간 덕분에 우리는 알뜰하게 돈을 모아서 종잣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낡은 관사는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한 디딤돌이었다.
사실 관사는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은 편이었다. 바깥세상(?)으로 나오려면 게이트 검문을 받아야 했다. 반면 편리한 점도 많았다. 도서관, 헬스장을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었고, 아침 식사도 간부 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병원, 목욕탕, 수선실, 골프장, PX 등 사관학교 안 허용된 시설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다.
민간인이었던 남편은 눈치가 보인다며 집안에만 있었지만, 군인이었던 나는 편하게 부대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생활은 최전방 부대와 너무 달랐다. 최전방 부대는 늘 경계 태세이기 때문에 긴장감이 감돌고 사람들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여기는 군사시설이지만 학교였다. 학교라는 곳이 주는 분위기, 최전방 부대보다 긴장을 조금은 늦춰도 된다는 점이 안락함까지 주었다.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서인지 주위를 돌아볼 줄 알았다
덕분에 내가 내미는 도움의 손길을 외면하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으며, 나 또한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남은 시간 동안 봄 향기를 만끽하며 산책도 할 수 있었다. 육군사관학교는 봄이 되면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했다.
보급대로 가는 육군사관학교 벚꽃길
특히 길가에 핀 벚꽃은 어두운 밤길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야간당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하얀 벚꽃에 비친 환한 길에 뿌려진 꽃향기와 봄이 주는 우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여유로운 생활을 하던 나와 달리, 남편은 힘든 출퇴근길을 말없이 버텨내고 있었다. 집에서 5분을 걸어 도착한 초소에서 신원확인을 끝내면 다시 보도블록도 없는 2차선 찻길을 30분 정도 걸어야만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남편은 매일 논밭 길을 걸어 학교 다니는 시골아이들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지금은 인근 공터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남편이 걸어 다니던 그 길에도 인도가 들어섰다. 그 길(인도)을 바라던 남편은 지금도 억울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남편은 가끔 출근길에 만난 누렁 강아지 이야기를 했다.
(남편) “출근길에 항상 나를 따라오는 강아지가 있어.”
(나) “어떻게 생겼어?”
(남편) “누런색의 토실토실한 작은 강아지야”
남편 말에 따르면 누렁이는 매일 출근길 어디선가 나타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남편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왔고, 가끔 너무 먼 길을 따라와 길을 잃을까 걱정스러웠다는 눈빛을 보였다.
그렇게 몇 달 동안 무료한 출근길을 함께 걷던 누렁이는 남편에게 친구처럼, 가족처럼 출근길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얼마 후 남편은 누렁이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때 남편에게서 어릴 적 친구와 헤어진 눈빛을 볼 수 있었다. 며칠 전 남편이 갑자기 누렁이 이야기를 꺼냈다.
“힘들고 외롭던 출근길을 함께 했던 누렁이가 지금 살아있다면 어떨까? 킥보드를 타고 누렁이가 걸었을 들판을 달려보고 싶은데.”라고 말을 이었다.
그러더니 며칠 후 차에 전동킥보드를 싣고 왔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전동킥보드를 타고 그때 그 시절 누렁이와 함께 걸었던 육사아파트 후문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데 어쩐지 남편의 표정에서 허전함이 느껴졌다. 남편은 예전 그 길을 가보면 모든 것이 그대로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남편은 출근길에 만나던 초소병과 군인들의 경례가 그렇게 어색하기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시 가본 그곳은, 그 초소도 군복을 입은 사람들도 사라지고 초소가 있던 자리에는 벽이 생겼다.
남편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그날 오후 우리 가족은 자동차를 몰고 그곳으로 향했다. 남편 말대로 그곳은 너무 변해있었다. 초소는 물론이고 우리가 처음 신혼을 시작했던 그 공간조차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남편이 누렁이와 걷던 그 비포장도로에는 인도가 만들어져 있었고, 초소 앞의 중국집과 작은 가게는 자취를 감췄고 나지막한 건물들이 들어왔다.
(남편) “호박아, 엄마 아빠가 처음 결혼해서 저 벽 너머에 있는 집에 살았었어.”
(아들) “저 벽 너머에 집이 있었어?”
아들에게 오래전 이곳이 어떤 곳이었는지, 이곳에서 어떤 추억을 만들었는지 이야기하는 남편을 아무 말 없이 바라만 봤다.
지금 나는 그때와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오늘을 추억하며 아이들에게, 친구에게, 손자 또는 손녀에게 이야기하고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