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나는 2004년 가을 우연히 어떤 회사 면접에서 만났다. 면접이 끝난 후 남편의 권유로 몇 명이 밥을 먹게 되면서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11월의 가을은 온갖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모집하는 취업 시즌이었다.
남편은 여러 군데 원서를 넣었고, 서울에서 면접을 보고, 더러는 지방에 면접이 있는 일도 있었다. 그 시절 나는 부모님이 계신 대전에 거주할 때였다.
첫 만남의 남편은 제법 유쾌한 사람이었다. 말도 재미있게 했고 먼저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할 정도로 붙임성도 좋았다.
취업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있었지만,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에 참여하고 면접이 끝나고 나오면 받는 교통비는 구직 시절의 재미를 더해 주었다.
남편은 그 당시 제법 여러 곳의 기업에 합격하였고, 그중 한 곳에 취업하게 되었으며, 나는 여군 장교로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 나 ) “나 여군장교 시험에 합격해서 군에 입대하게 되었어.”
(남편) “꼭 가야 해?”
( 나 ) “어렸을 적에 군인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었고, 기회가 되었을 때 한번 경험해 보고 싶어”
남편은 내가 군에 간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이내 받아들였고 응원해 주었다. 나는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경북 영천에 있는 사관학교에 입교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여군장교가 되는 방법이 많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에서도 여군을 뽑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지금은 3사관학교, ROTC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군 인력을 양성하지만, 당시는 인원도 적었고 여군장교는 흔하지 않은 때였다.
훈련기간 동안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나갔다. 그때만 해도 결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남편은 꽤 세심한 편이었다. 편지 봉투에 총기 손질할 때 쓰라고 면을 넣어 보내주기도 했었다.
임관 후 1년이 지날 시점 나는 육군사관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남편과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결혼하고 싶어진 나는 결혼이야기를 꺼냈다.
( 나 ) “우리 결혼하자.”
(남편) “갑자기?”
( 나 ) “지금 결혼 안할거면 그냥 헤어지자.”
(남편) “모아둔 돈도 없고, 준비도 안됐는데...”
( 나 ) “할거야? 말거야?”
(남편) “하긴 할건데... 갑자기.”
남편은 퍽 당황스러웠던 것 같다. 남편의 당황스러움은 당연했을 것이다. 만나자 마자 군대 가고 전방부대로 발령나더니 서울로 오자마자 결혼하자고 하니 내가 생각해도 그때 나는 참 독특한 여자였다. 상황과 감정에 솔직한 나는 돌직구를 던졌던 것이다. 결혼을 혼자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후회는 없다. 나이 들어 세상물정 다 알고 나면 혼자 산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상님이 세상 물정 몰랐던 나에게 짝궁을 점지해 주셨나보다.
무엇보다 그때는 무일푼이어도 결혼하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도 알뜰한 편이였고, 둘 다 직장도 튼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젊어서 그랬을까? 지금보다 훨씬 용감하고 믿음이 강했던 것 같다.
결혼준비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남편의 고민은 계속 느껴졌다. 사회초년생인 남편은 모아둔 돈이 없었다. 그래도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내가 일하는 육군사관학교 안에 는 육사회관이 있었는데 제법 멋진 결혼식장이었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고 탁 트인 개방감에 사관학교 출신과 장군의 자제들까지 줄 서서 예약하는 곳이었다. 비용도 무료였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육사회관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리 결혼 준비의 최대 화두는 최소 비용의 결혼이었다.
( 나 ) “결혼식장은 육사회관으로 하면 비용이 안 들 것 같아.”
(남편) “혼수와 예단은 부모님을 설득해서 생략하자.”
( 나 ) “좋은 생각인걸? 그러면 더 합리적으로 결혼을 진행할 수 있겠다.”
우리는 과감하게 혼수와 예단을 생략했다. 양가 부모님도 우리가 알뜰살뜰 결혼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고 예뻐 보였는지 감사하게도 우리 의견을 지지해 주셨다.
신혼집은 육사아파트로 결정했다. 관사를 배정받기 위해 결혼 6개월 전에 먼저 혼인신고를 했다. 살림살이는 남편이 자취할 때 썼던 것들로 꾸렸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알뜰살뜰 열심히 살림을 꾸려가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그래서 혼수나 예물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남편은 신부에게 주는 예물만은 좋은 것으로 해주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예약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치 같았다. 군인인 내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도 다닐 것도 아니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꼭 갖고 싶은 생각도 별로 없었다. 다음 날 전화로 예약을 취소했다. 약간 아쉽기는 했지만 홀가분했다.
(남편) “당신 괜찮겠어? 그래도 예물은 좋은 걸로 하지?”
( 나 ) “지금 우리한테는 필요하지도 않은걸? 우리 지금 다 갖추고 시작하기보다는 살면서 하나씩 장만해 나가는 즐거움을 느껴보자. 그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
비용을 최소화했다고 해서 초라하거나 소박한 결혼식이 되지는 않았다. 여군 동기들이 예도를 해주었고, 친한 친구가 축가를 불러 주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일하는 보급대 병사들에게도 알려서 결혼식 당일 그들은 짬밥 대신 뷔페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아낀 결혼 비용과 양가 부모님이 받은 축의금까지 더해지면서 결혼하면서 오히려 목돈이 생겼다. 대부분 결혼하고 나면 0에서 시작하는 예도 많은데 우리는 오히려 +에서 시작한 것이다. 그 돈은 이후 전세자금과 내 집 마련의 귀한 종잣돈이 되었다. 덕분에 우리는 예상보다 조금 더 빨리 내 집 마련을 할 수 있었다.
우리 부부는 결혼 13년 만에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그동안 절약한 돈을 풀어서 결혼식 때 하지 못했던 혼수 장만을 시작했다. 새집에 들어갈 새 가구와 가전제품을 마음껏 골랐다. 발품을 팔면서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피곤하기는 했지만 설레기도 하고, 행복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지금은 남편과 나 둘이 아니라 아들까지 셋이 되었다는 것이다.
(epilogue)
남편 생일과 돌아가신 친할아버지 기일이 같은 날이다. 친정엄마는 처음 남편을 데려온 날 정말 마음에 들어 하셨다. 헤어질 위기가 왔을 때 친정엄마는 남편이 나랑 헤어지더라도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실 정도로 남편을 좋아하셨다. 인연이 돼서 결혼했고 친정엄마와 남편은 여전히 사이가 좋다. 가끔 돌아가신 친할아버지가 남편과 나를 연결해 주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