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간단히 시리얼 같은 것을 먹고 등교하던 아들이 잠들기 전에 'VOC(고객의 소리)'를 접수한다.
"내일부터는 아침에 밥 같은 것 먹고 갈래"
"갑자기? 왜?"
"응, 수업시간에 배가 많이 고파"
아이는 4학년이 되어 점심시간이 1시간 뒤로 늦춰지면서 4교시 수업시간에 꼬르륵 거리는 배고픔과 사투를 벌이며 수업에 임하다가 결국 스스로 든든하게 먹고 가야겠다는 결단을 내린 듯했다.
아들의 민원을 접수하고 아들의 고충 처리반인 나는 다음날 아침 든든한 아이의 하루를 위해 야침 차게 갈비탕과 밥을 준비했건만, 먹방 유튜버 저리 가라인 아들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말한다.
"엄마, 아침에 샌드위치 먹고 갈래"
이 말을 들은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밥이 빵보다 나을 텐데... 이왕이면 밥으로 먹고 가지...'
하지만 이 말을 한다고 아이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알기에 마음속 진실과 반대로
"그래, 내일은 계란이랑 햄 넣고 샌드위치 해줄게"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이의 든든한 아침 샌드위치를 위해 아침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 '베이커리 가게'에 들려 토스트 식빵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간다.
'이 식빵이면 제대로 된 아들의 VOC처리를 할 수 있을 거야. 내일은 꼭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고객만족의 꿈을 이뤄내겠어'라고 마음속 작은 의지를 불태우며 혼자 속으로 키득키득 웃는다.
계산원은 빠른 손놀림으로 계산하며 묻는다
"할인카드 있으세요?"
나는 핸드폰에 '통신사 멤버십'어플을 찾으며 대답한다.
"네, 잠시만요"
어플에 업데이트를 하라는 에러 메시지가 뜬다.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다른 분 먼저 해주세요"라고 말하며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다. 하지만 아무리 만지작 거려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다. 결국 할인을 포기하고 계산하고 가게 밖으로 나와 가던 길을 멈추고 계속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다.
통신사 어플로 들어가면 업데이트하라는 메시지와 함께 'O**스토어'로 연결되고, 연결된 'O**스토어'로 들어가면, 보안상의 이유로 업데이트가 되지 않고 지속적인 에러 메시지가 뜬다.
핸드폰에서 이 'O**스토어'를 안전하지 않은 앱으로 인식하면서 이 앱을 통한 '멤버십 어플' 설치가 아예 되지 않는 것이다.
이 사건은 평온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나의 일일열차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몇십 분의 계속된 오류는 어느새 인내의 시간이 분단위로 쌓여 마음속 화의 불씨가 밖으로 튀어나와 타오를 것 같은 임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 불씨가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발버둥 칠 때마다 나는 그 불씨를 계속 꺼가며 핸드폰 어플의 업데이트 화면의 틀에 고정돼 집착하고 있는 거울 속에 갇힌 또 다른 나의 모습을 인지했다.
인지하는 순간 '잠시 멈춤'이라는 본능에 가까운 적색등이 작동되었다. 그 순간 그 거울은 금이 가기 시작하며 나의 뇌가 위치한 머리 주변으로 찬바람이 휙 지나간다.
'대체 'O** 스토어'는 뭐지?' 내가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앱인데? 유명 통신사 멤버십 앱이 이 'O**스토어'에서만 설치되고 업데이트된다고? 뭔가 이상한데?'라고 그 꽂혀있던 핸드폰 화면을 벗어나 생각한다. 내 머리에서 시작된 그 찬바람은 나를 가둔 거울로 이동되어거울을 깨며, 그 속에 갇혔던 나와 그 작은 문제는 무사히 거울을 탈출해 밖으로 나온다.
집착이라는 감정을 쏟고 있었던 그 고정된 틀의 화면을 닫고, 평소에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플** 스토어'화면을 열었다. 그리고 그 화면에서 'K* 멤버십'을 검색하는 순간 멤버십 어플은 순조롭게 업데이트가 되었고, 적색등은 초록등으로 바뀌었으며 열차는 브레이크를 풀고 다시 천천히 달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누구나 원하든 원치 안 든 틀 안에 소속되어 있다. 태어남과 동시에 출생신고를 하면 사회라는 틀에, 성장하면서 유치원, 학교, 직장을 거치면서 우리는 또다시 사회보다 더 작은 이 틀 안에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가게 된다.
틀 속에서
그리고 그 틀의 규범을 잘 지킨 대가로 안전하게 보호받고 소속감을 느낀다. 나는 그 보호와 안전을 갈망하는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안에서 고정관념이 시나브로 나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 틀 안에서 많은 부분 희생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깨고 나오지 못했다.
고정관념
집단을 범주화하는 단순화된 도식의 하나. 특정 개인의 독특한 개성이나 개인차 혹은 능력을 무시한 채, 단순히 그 개인이 특정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개성이나 특성, 능력을 특정하게 또는 특정 범주로 귀속시키는 관념이나 기대.
사회구성원의 일원으로서 그 틀 안에서 어우러져 살아가야 함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지만 그 안에 매몰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강한 고정관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 고정관념이 집착을 만들기도 하고 그 집착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나서야 뒤늦게 후회하고 깨닫기도 한다.
그 틀을 벗어나 생각하고, 그 틀을 깨고 나와야 바로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떤 틀 속에 갇히지 말라.
(전략)
갇히면
거기에 머물게 되고,
머물면 집착이 생기며
집착이 생기면
그에 따른 괴로움이 생기게 마련이다.
(중략)
틀속에 갇혀 있을 때는 나만 옳은 것 같고,
남들은 다 틀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남들과 마찰도 많고, 싸움도 많고,
근심 걱정도 많을 수밖에 없지만,
그 틀을 빠져나오고 보면
모두가 서로 다르면서도 우주적인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모습임을 깨닫게 된다.
[달마넷 법상스님 칼럼 中]
우리 모두는 틀(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데, 그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침에 밥 대신 빵(샌드위치)을 먹겠다는 아들의 말에 빵보다 밥이 좋다고 생각한 것 또한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머리에 주입된 고정관념이었다. 빵은 다른 나라에서는 주식으로 먹었던 음식이고, 더군다나 계란, 치즈, 야채가 믹스된 샌드위치는 밥보다 오히려 더 균형 잡힌 음식일 수 있는데 말이다.
밥 대신 빵을 달라는 아들의 말에, "빵 대신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냐"는 프랑스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와네트가 생각난다. 최근 들어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졌지만 몇십 년 동안 그 틀 안에 가둬 두었던 마리앙투와네트의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틀 안에서 한번 형성된 고정관념은 거짓 앞에서도 당당하다.
그리고 왕실과 귀족이라는 틀 안에 있었던 마리앙투아네트는 종국에는 그 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소속된 틀이 양날의 검이 되어 나를 향하는 시기가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수많은 틀에 속해 살아가는 것이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라면, 그 간극을 현명하게 넘나들고, 결정적인 순간, 용기를 내서 그 틀을 깨뜨릴 줄 아는 머물 때와 물러설 때를 조절할 줄 아는 그런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