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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는여자 Apr 12. 2023

김밥을 사이에 둔 '링 위의 결투'

당신은 항상 옳다

내일을 준비하는 쾌적한 스터디 카페, 나를 위한 안락한 시간이 종료를 알렸다. 바로 아들이 하교했다는 알람이 왔기 때문이다.

빠른 손놀림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가방을 메고 나간다. 아침 내내 비가 온 후, 며칠 전까지  매일 외출했던  햇살은 피곤함에 자취를 감췄다.

땅은 젖어 있고 날은 흐릿하다. 젖은 땅과 흐릿하고 바람 부는 쌀쌀한 날씨가 뜨거운 국물을 생각하게 한다.


' 아~ 맞다. 아들이 간식으로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했지.'


떡볶이를 사갈 생각에 마음이 즐겁다. 입에는 침이 고인다. 아마 내가 더 먹고 싶어서 그런가 보다.




 "사장님 , 여기 떡볶이랑 어묵이랑 김밥 포장해 주세요. 참, 김밥은 다이어트 김밥(밥은 조금, 야채가 많이 들어간 김밥)으로 주세요.(먹더라도 건강을 생각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해서 핸드폰을 마지작 거리며 밀린 카톡을 확인한다. 역시 핸드폰은 기다림의 시간을 짧게 만들어주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임에는 틀림없다.


기다리는 분식집에는 오랫동안 이 근처에 거주하셨던 어르신 및 주민들이 여러 명 드나든다. 일상을 전하며 사장님과의 친근함을 표시한다.


그 모습들을 조용히 보고 있는 나는 이방인이라는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나는 관찰자인 이방인 모드를 즐긴다.


"여기 주문하신 음식 나왔어요."


플라스틱 백에 담긴 떡볶이와 어묵 김밥을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한다. 집까지는 300미터가 채 안 되는 짧은 거리이다.


들고 있는 따뜻한 떡볶이의 온기, 사이좋게 서로를 맞대고 포장되어 있는 음식들, 그 음식들의 보이지 않는 수증기가 나의 코로 들어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집으로 가는 길이 평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분식점에서 300미터 남짓의  집으로 가는 길.


이 길 위에서 나는 가상현실로 만들어진 "링"위의 결투를 관람하게 된다.


밥때를 놓친 식욕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선수 중 한 명인 "본능(식욕)"이 먼저 그 등장을 예고한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잠을 자고 있던 "이성(체면)"을 자신의 결투 대상으로 지정할 모양이다.


그 결투를  직감했을 때, 뇌의 신호를 받은 생각이 밖으로 나오며, 나를 동요시킨다.


'아~ 먹고 싶다. 김밥은 먹으면서 가도 될 거 같은데...'  나는 플라스틱 백 안, 떡볶이 위에 올려진 김밥을 보며 생각한다.


나의 식욕이라는 본능이 드디어 링 위에 등장한다. 이미 링 위에 있던 "이성(체면)"은 이 "본능"의 등장을 예감하고 있었나 보다.


이성(체면)은 주먹에 글러브를 끼고 양발을 좌우로 움직이고 있다. 그는 양발을 왔다 갔다거리며 공격에 맞서기 위해 준비태세를 갖췄다.


"식욕(본능)"은 아랑곳하지 않고 갑자기 그  "이성(체면)"에게 훅을 날린다. 깨어 있던 "이성(체면)"은 쓰러진다. 밥때를 놓쳐서 누구보다 강력해진 "본능"은 그렇게 훅 한방으로  이성을 잠재운다.

훅 한 번으로 '이성'을 제압한 식욕은 링의 지배자가 된다. 식욕의 지배를 받은 나의 왼손이 오른손에 들려있는 비닐봉지로 향한다.


왼손이 김밥을 빼서 먹으려는 액션을 취하려는 순간 다시 링 위에 쓰러져 잠자고 있던 이성이 번쩍 일어난다.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어른이 길거리에서 김밥을 먹어? 다시 생각해 봐. 주변의 보는 눈이 신경 쓰이지 않니? 그러다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민망하잖아' 역시 나의 '이성'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들어, 봉투로 향하던 왼손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하지만 평소에도 왕성한 식욕은 밥때를 놓쳐 더 강력해졌음을 잊으면 안 되었다.


 쓰러졌던 '이성'이 정신을 차리자 마음이 급해진 '본능'은 이번에는 어퍼컷을 날린다. 이 어퍼컷에 다시 일어섰던 이성은 휘청거리며 쓰러진다.

그 필살기에 나의 배는 '꼬르륵 소리'를 내며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김밥을 내놓으라며 발버둥 친다.


나의 '식욕'은 알 수 없는 음흉한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나는 김밥을 꺼낸다.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간 나의 '이성'은 마지막 안간힘을 낸다. 그리고 자기 자신한테 말한다. '정신 차려, 일어나야지. 넌, 그렇게 쉽게 쓰러지지 않아. 포기하지 마'


그 순간 나는 늦은 오후 보도블록을 걷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손에 들었던 김밥을 살며시 봉투에 넣는다.


이성이 온 힘을 다해 그렇게 공격을 막아내던 순간, 나는 아파트 단지 출입문에 도착했다. 카드로 출입문을 열고 또다시 배고픈 식욕이 쫓아올까 눈앞에 보이는 까지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휴우~ 드디어 결투는 끝났다. 그리고 내 '체면'을 지켰다." 안도감에 마음이 편해진다.


집에 도착하니 아들이 손에 들린 간식을 보고 활짝 웃는다.


그렇게 '링 위의 결투'는 이성이 끝까지 자신을 지키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본능(식욕)과 이성(체면)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하지만 마주 볼 수 없는 야누스 같다.


나는 링 위의 결투를 관전하면서, 늘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는 내가 보였다. '체면'을 차리고자 하는 것도 떳떳해 보이고 싶은 본능일까? 사회적 탈을 쓰고 있는 '체면'의 원천은 거슬러 올라가 식욕과 같은 본능의 뿌리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른다.


사전적 의미로 "체면"은 남을 대하기 떳떳한 도리나 얼굴이다.


"본능"은 어떤 생물체가 태어난 후에 경험이나 교육에 의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나 충동이라 정의한다.


어쩌면 태초에 체면을 만든 것은 인류의 사회화가 진행되면서 떳떳한 얼굴을 가지고자 했던 본능이었으리라.


이 순간에도 나는 두 가지 욕구와 가치사이의 갈등을 '링 위의 결투'로 소화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시간 다른 공간 어디서나 우리의 머릿속은 나도 모르는 '링 위의 결투'를 치르고 있을지 모르다.


그 결투에서 누가 이기든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지켜내길 바라본다.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은 항상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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