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하면 학창 시절 미술교과서에 실려있는 황소그림만 생각했다. 그게 내가 아는 이중섭의 전부였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본 이중섭의 작품세계는 따뜻하고, 애절하고 인간적이었다.
가족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그의 마음이 작품에 잘 표현돼 있어서 가슴이 먹먹했다.
가족을 떠나보낸후 홀로 생을 마감한 그가 남긴 작품이 사랑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이유이다.
같이 간 동생이 이중섭 미술전을 다 보고 나오면서 말한다.
(동생)"이건희 회장이 왜 이중섭 그림을 좋아한 줄 알겠어."
(나)"왜?"
(동생)"이중섭은 훈남인 것 같아."
이미 고인이 된 작가가 훈남일 거라는 생각은 못해보았는데... 나에겐 참 신선한 단어였다.
실제 이중섭이 일본 제국미술학교시절 학교에서 인기남이었다고 한다. 노래실력, 운동실력, 그림실력 뭐 하나 빠지지 않았고 미남이기까지 했으니 당연했을까? 그의 젊은 시절을 회상해 보니 활기차고 인기남이었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이중섭은 유학시절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와 결혼 승낙을 받고 1944년 12월 마사코를 조선에 불러온다. 1945년 5월 그는 마사코와 결혼식을 올리고 이남덕이라는 한국이름을 지어주었다.
중섭의 부인인 야마모토 마사코는 만남부터 이중섭이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의 작품활동에 영감을 주는 영원한 뮤즈였다.
1950년, 평안남도 출신인 그는 6.25 전쟁 이후 원산의 터전을 버리고 흥남철수에 동행하여 남한으로 내려왔다. 이후 유복하게 자란 이중섭은 생계가 막막하였고, 이시절 부인인 이남덕이 재봉질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야마모토 마사코 역시 유복한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재봉질을 하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1951년 정부의 수용피란민 소개정책으로 제주도 서귀포에 거주하여 생활하기 시작한다. 중섭은 이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이 시절 작품에는 게, 물고기등의 바다 생물이 자주 등장한다. 게를 잡고 바다를 바라보며 평화롭게 작품생활을 한 제주도의 그가 그려진다. 이시절 그의 옆에는 두 아들과 아내가 있어 더욱 행복했을 것이다.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이런 생활도 잠시 1952년 장인의 부고소식을 듣고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간다. 중섭은 해방 후 한일 간 국교단절로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이 시절 가족과 이별한 후 재회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중섭은 이후 단기체류로 일본에 일주일간 거주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가족들을 볼 수 없었다.
훗날 마사코는 아고리(이중섭)에게 사랑받은 자신과 두 아들은 행복한 사람이었노라고 말한다.
중섭은 39세의 젊은 나이에 황달, 정신병, 거식증이 겹쳐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다.
이중섭은 가족과 아이들을 작품에 자주 표현하였고, 가족을 그리워한 그의 마음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시대별 그의 작품을 보면 그의 작품은 그의 삶 전부였음을 알 수 있다. 마음과 작품이 일치하는 그의 삶, 그래서 더 인간애가 느껴지고 마음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이중섭이 한국근현대 미술의 대표 화가이자, 비운의 화가라고 하지만 나는 오늘 이중섭을 한 인간으로서 마음에 담고 기억해 주고 싶다. 그의 미술세계는 이중섭 그 자체였을 테니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