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시작하는 7번 국도 여행을 위해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경부 고속도로 위를 달린다. 수도권을 빠져나와 빗속을 뚫고 어느 지점을 달리고 있는 우리는 우측에 설치된 방음벽과 높은 산, 그리고 그 방음벽 뒷편의 논밭과 나즈막한 집들을 보며 어디를 달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높고 큰 방음벽이 한칸 한칸 연결되어 있고, 각 칸마다 좌우, 위아래의 중간에 네모난 문이 나있다. 그리고 방음벽의 그 문은 마치 건물의 창문이 열려있는 것처럼 활짝 열려있다. 방음벽의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시골마을의 풍경은 빗속을 달리는 특별한 전시회에 초대받아, 창문이라는 액자에 실시간으로 그려진 그림을 관람하는 느낌이었다. 그 특별한 전시회 속에서 에드워드 호퍼가 생각났다.
멀리서 창을 통해 보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자 시점, 호퍼는 이 시점으로 뉴욕이라는 도시와 그 도시속의 사람들을 그린 미국의 대표 화가이다. 또한 기차와 배를 좋아했던 호퍼의 그림을 보면 마치 기차를 타고 달리는 창밖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서울시립미술관과 철길의 석양
에드워드 호퍼는 네덜란드 이민후손인 뉴욕커이다. 호퍼의 부모님은 엄격한 침례교신자로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어린시절 그는 포목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격려와 지원을 받으며 미술을 공부했다.
12살때 190센티가 넘는 큰키와 야윈몸을 가진 그는, 메뚜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또래들 사이 소외된 감정을 느끼며 자랐다.
어릴적 그의 경험은 이후 "자화상"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주는 냉소적 표정이나 도시사람들의 감정과 도시의 풍경을 담아낸 그림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자화상 (사진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호퍼는 부모님의 권유로 일러스트학교에 입학하지만 1년 후인 1900년도, 부모님을 설득하여 뉴욕예술디자인학교에 입학한다. 이때, 미술학으로 전공을 변경한다.
1905년 광고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그는, 10개월간 파리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부터 그는 파리를 사랑하게 된다. 역사가 보존된 '파리'는 당시 산업 혁명을 겪고 있던 '미국'과는 달랐고,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역할을 했다.
호퍼가 제작한 잡지표지
'파리'와 '인상파'를 사랑하고 '드가'와 '샤를 메리옹'을 좋아했던 호퍼.
폭풍속의 범선, 샤를 메리옹
하지만 실용적인 성격인 그의 그림은 그들과 달랐다. 그는 사실주의 화가였고 그의 그림은 이를잘 보여준다.
이 시기는 후기인상주의와 입체파, 야수파에 동요되던 시기였다. 미국은 마크 로스코의 추상주의에서 팝아트로 넘어가는 시류를 탔던 시대였다. 호퍼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그림이 더 빛나는 것 아닐까?
호퍼는 뉴욕예술대학 시절 같은학교를 다니던 조세핀과 결혼한다. 조세핀은 호퍼의 예술가로서의 삶에 가장 큰 조력자였다. 이번 전시에도 조세핀의 테마가 따로 있기 때문에 조세핀의 조력과 활약을 볼 수있다.
호퍼와 함께 관람한 공연티켓을 모아두었던 조세핀
어두운 도시 속, 불켜진 식당에 앉아있는 세사람이 보이는 "밤의사람들". 불꺼진 도시의 고요함속에 식당의 사람들을 통해 도시의 고독함이 느껴진다.
호퍼는 한 인터뷰에서 인간의 고독을 표현했냐는 질문에 '보는 사람 몫'이라고 말한다. 해석의 자유로움이 주는 묘미 또한 예술의 매력이다. 그럼에도 호퍼의 작품을 보는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그의 그림에서 도시인의 고독과 외로움을 느낀다. 대중이 느끼는 감정이 호퍼가 표현하려던 것일까?
"밤의 사람들"은 광고, 만화등을 통해 다양하게 패러디된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이 작품이 대중적인 이유가 이 작품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대중이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밤의 사람들' 패러디
그림은 말이 없지만 작가는 그림으로 말한다. 그림에 나타나는 메세지로 작가는 대중과 교감한다. 그 교감이 미국인들이 사랑하는 화가 호퍼를 탄생하게 한 이유 중 하나 일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죠"라는 호퍼의 말처럼 말없는 그림은 반대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메세지를 간직하고 있다. 그의 그림을 보며, 그것을 찾는 재미도 느껴보는 것이 어떨까?
"사랑해"라는 달콤한 말을 했다하더라도 거짓일 수도 있고, "사랑해"라는 감정을 어떻게 느끼는지는 개인마다 다르지만 그럼에도"사랑해"라는 말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처럼 말이다.
그림은 사람마다 다른, 그 오묘한 감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 얼마나 심오하고 즐거운가?
방에 서서 햇빛을 받고 있는 여인이 그려진 "햇빛속의 여인"은 아내 조세핀 이다. 자연을 상징하는 산이 보이는 창을 통해 빛을 받고 있는 태초의 인간을 상징하는 옷을 걸치지 않은 여인.
자연과 사람이 태초 하나였음을 말하는 것 같다. 아니면 공존하고자 하는 것일까? 침대 아래 벗겨진 구두와 집안의 네모난 침대는 자연과 대조적이다.
산업화 시대 뉴욕, 자본이 들어오고, 철도, 항만, 건물들...점점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편리해지고 풍요로워진 시대속에서 자연의 일부분이었던 인간은 무엇을 느꼈을까?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낸 작가의 마음은 어땟을까? 작가 사후, 그림을 통해 교감할 수 있기에 지금 우리들이 여기에 있다.
작가의 삶과 그 시대를 그림을 통해 볼 수 있었고, 산업 혁명의 시대 뉴욕에 살았던 호퍼의 삶을 반영하는 그림속의 사람들이 주는 감성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내면과 겹치는 듯 했다.
산업화를 지나, 21세기 과학기술의 발전 속에 있는 우리의 모습이 그 시대 그의 그림 속에, 미리 그려진 것 같은 여운이 남는 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