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딨노, 니?" 영화의 윤리의식을 되묻다
내게 라스트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살인의 추억'이다. 박두만(송강호)이 형사를 그만둔 후 우연히 과거의 사건현장을 지나다 하수구를 들여다보는데, 한 여자아이가 말한다. “아저씨, 그 안에 뭐 있어요? 며칠 전에 다른 아저씨가 와서 들여다보고 갔는데.” 그 때 박두만의 표정. 잊고 지내려 했음에도 한순간 다시 밀려오는 미련과 회한, 섬뜩함이 범벅된 송강호의 얼굴은 그 자체로 영화의 주제의식이었다. 이 장면은 그토록 잡고 싶은 범인이 우리 곁에 평범한 얼굴로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소름끼치는 진실을 암시하면서, 관객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송강호의 허망한 표정을 통해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범인을 잡지 못한 형사 박두만의 슬픔은 80년대 우리의 아픈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제사건으로부터 희생자들을 지키지 못한 우리모두의 슬픔으로 치환된다.
정말 오랜만에 이와 비견할 만한 라스트신을 만났다. '암수살인'에서다. '암수살인'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영화관에 갔다. 신문기사에서 봤는데도 잊어버렸을 정도로 와 닿지 않는 용어다. 그래서인지 오프닝 크레딧은 '암수살인' 이 '아무도 모르는 살인'을 의미한단 점을 분명히 규정한다. 여기서부터 의문은 시작된다. 아무도 모르는 살인이란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보통의 범죄영화는 범인을 잡는 과정을 좇아간다면 이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범인이 잡힌다. 범인은 역으로 미끼를 던진다. 살해와 사체유기 등 혐의로 체포된 강태오(주지훈)가 형사 김형민(김윤석)에게 자신이 총 7명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태오는 구치소 접견실에서 각 사건의 디테일한 단서들을 형민에게 전한다.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게 아닌 여죄를 자백하는 피의자. 또라이라며 무시할 법도 하지만 거짓이라기엔 너무 구체적이고 신빙성 있는 단서들에 형민은 일단 태오를 믿고 수사를 진행해 보기로 한다.
피의자의 진술에 의존해 피의자 진술의 진위를 검증해 나가야 하는 이상한 수사. 형민은 태오가 교묘하게 거짓을 섞는 것을 알면서도 큰 틀에선 태오를 무한신뢰한다. 그를 믿지 않으면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수사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태오와 형민의 독특한 관계는 이 영화의 가장 큰 재미요소가 된다. 초반엔 단서를 가진 태오가 갑의 입장에 선다. 형민을 상대로 밀당을 하며 영치금과 옷가지 등 물건들을 받아내고 공권력을 조롱한다. 형민은 자비를 줘가면서까지 태오를 구슬리고 때론 원하는 진술이 나올 때까지 뜸을 들이며 신중히 태오를 다룬다.
접견실 밖에선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태오의 진술 속에서 진실을 길어올리려는 형민의 고군분투가 이어진다. 형민의 진술은 바로 다음 플래시백 장면에서 영상으로 재현된다. 관객들은 이를 통해 형민이 풀어나가는 수사의 전개를 확인하는 동시에 태오가 어떤 유년시절을 보냈는지,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때 이 영화가 인물을 다루는 남다른 방식은 이 영화의 윤리의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먼저 남들은 다 말리는 암수살인에 집착하는 형민의 태도다. 처음엔 대형 사건을 물어 실적을 올리려는, 혹은 범인잡기에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그렇고 그런 형사 중 하나로 보이지만, 형민의 동기는 다른 데 있음이 점차 드러난다.
골프를 취미로 즐길 정도로 경제적 형편이 좋은 형민은 형사 본연의 직업윤리를 갖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원칙주의자다. 사람이 죽었으면 늦더라도 범인을 잡아 원통함을 풀어주고, 범인은 죗값을 제대로 치르게 해 더 이상의 무고한 피해자를 막아야 한다고 믿는다. 이 신념이 형민을 집요하게 움직이게 하고, 태오의 거듭된 조롱과 주변의 멸시를 이겨내게끔 한다. "내가 너를 이겨서 뭐하겠노"라는 형민의 말은 중요하다. 태오가 "당신은 날 못 이겨"라고 도발하지만 형민은 태오가 아닌 다른 목표를 향했기에 이 게임의 양상은 반전된다.
영화는 태오에 대해 애써 다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그가 벌인 범행들과 불가해하고 기행적인 행동, 극단적인 감정기복 등을 통해 태오가 어떤 인물인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태오가 부산의 자갈치시장의 밑바닥에서 자랐으며 유년시절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다는 불우한 가정환경이 영화 후반부에 드러나지만 감상적인 접근은 없다.
태오라는 괴물이 탄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을 파헤치거나 그의 불우한 환경을 동정하는 대신 영화는 '피해자들'을 조명한다. 태오가 어떻게 칼을 휘둘러 살해했는지 천착하기보다, 아무도 모르게 죽어간 피해자들이 죽음의 순간 느꼈을 고통을 피해자 입장에서 묘사한다. 형민의 최후진술 내용이다. 실화를, 살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영화적 흥밋거리로 소비하지 않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화는 특별한 클라이막스 없이 종반으로 흐른다. 모든 단서를 태오가 쥐고 있던 애초부터 불공정한 게임에서 형민은 내내 지는 듯 보이고 파출소로 좌천되는 수모를 당한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게임은 아주 작은 단서 하나로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면서 결국 태오의 발등을 찍는다. 성실하고 집요한 수사는 결국 암수살인을 세상에 드러냈고, 자신의 완전범죄를 과시하며 감형을 이끌어내려던 태오는 제 꾀에 넘어간다. 아무리 비상한 인물이어도 사람이 하는 범행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고, 그 작은 틈을 발견하게 하는 건 정직하고 우직한 수사뿐이라는 평범한 교훈을 보여주며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교훈이란 결코 가볍지 않다. 형민의 수사 속에서 다수 발견되듯 제대로 수사만 했어도 태오는 훨씬 빨리 잡힐 수 있었고, 그럼 무고한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무덤덤하게 달리던 영화는 막판에 '훅'을 날린다.
"어딨노, 니?"
형민은 광활한 대지에서 여전히 피해자를 찾아 헤맨다. 형민이 피해자를 일감이 아닌 '사람'으로 대하고 있음이, 그 인간적인 진심이 오롯이 드러난 이 말은 가슴을 후벼판다. 형민은 태오를 잡아넣고도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주려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실제 형민의 모티브가 된 김정훈 형사가 수사를 계속하고 있다는 자막이 이어지자 소름이 돋는다.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죽어간 이들의 사건을 재조사하고 기억하려는 형민의 행위는 이 라스트신을 통해 '살인의 추억' 속 화성 연쇄살인사건만큼이나 사회성을 획득하고, 관객들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스릴 넘치는 추격신이나 잔인한 살인의 묘사, 극적인 시각적 효과는 없지만 이 영화가 '살인의 추억'의 계보를 잇는 한국 범죄영화의 수작이라고 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살인을 대하는 윤리의식이 관건이다. 개봉 전 피해자 유가족들이 문제를 제기했다가 조건 없이 고소를 취하한 것도 이런 진심이 통해서일 거다. 결국 무엇을 다루는가보다 '어떻게' 다루는가가 중요하다.
형민이 한국영화에서 흔히 보이던 전형적인 형사 이미지와는 다르게 여유있고 냉철하게 그려진 것은 의미심장하다. 형민의 이런 디테일은 감독이 실제 인물(김정수 형사)에서 착안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 김정수 형사는 골프를 치며 살인범과의 대화를 복기하고 다음 수사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형사 본연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단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든 진영의 논리에서 자유로워져야 청렴할 수 있나 싶어 씁쓸함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