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99.
아침 출근 지하철에서 마침 유년기의 지하철이 생각났다. 우리 외할머니(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여자들 중 한 명)가 갑자기 역촌동에서 그 먼 상계동 한신 아파트로 이사 가시면서 외갓집 방문도 큰 맘 먹고 해야하는 일이 되었던 때가 있었다. 왜 그 멀리까지 이사를 갔냐고 우리 엄만 늘 투정이었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상계동 외할머니댁까지 데리고 간 적도 많았고, 주말 내내 외할머니 댁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월요일 학교 가기 전 새벽에 아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많다. 월요일 새벽, 할머니가 우리를 깨우면, 잠이 덜 깬 나는 서서 걷고, 동생은 아빠가 안아서 차까지 데려오면, 이 녀석은 뒷좌석에서 내 무릎을 베개 삼아 다시 곤히 편하게 숙면을 취하곤 했다. 나도 이 녀석의 뒤통수때문에 무릎 담요를 덮은 듯이 따듯하게 맛난 새벽잠에 다시 들 수가 있었다. 대부분 겨울쯤에 이 '새벽 복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차안의 온기는 더 따듯하게 느껴졌었다.
우리 집에서 출발 할 때는 지하철로 많이 이동을 했는데, 멀리 하늘색 라인까지 가서(내 기억에 거의 하늘색 종점역 같았다) 다시 마을 버스를 타고 아파트 입구까지 가야했다. 엄마가 모임이 있어서 우리 둘을 맡겨야 하는 날엔, 충무로역까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마중을 나오셨다.
내가 갑자기 유년시절 외갓집 가는 길, 지하철 이야기를 하는 건, 오늘 아침 내가 지나온 '충무로 역'이 내겐 그냥 지하철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역사 내부가 그렇게 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외갓집을 다닐 당시에만 해도 충무로 역은 동굴 같은 벽과 울퉁불퉁하고 어쩐지 무시무시한 돌들이 플랫폼 옆 벽에 튀어나와 있는 인테리어를 가진 곳이었다. 다른 역들은 평범하고 편편한 벽에 역 이름이 더 튀어 보이는 곳들이었지만, 충무로 역은 지하철이 플랫폼에 다다르느라 속도를 줄일 때, 바깥의 붙위기와 그 동굴 같은 벽만 보고도 '아, 충무로 다 왔네'라고 알 수 있었다. 어린 나에게 그 역은 무시무시한 동굴 같았지만 언제나 지하철에서 내리면,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계셨고, 두 분을 만나서는 하늘색 라인을 타고 상계동 외갓집으로 갔다.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서는 어느 순간부터 충무로역이 그렇게 무시무시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하철 컴컴한 밖을 응시하다가도 다음 역이 밝고 평범한 벽이면 '아직 충무로 아니네...'하고 실망하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젠 우리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우리 동네로 이사를 오셔서 차로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사시지만, 왠지 상계동에 가면 그 시절의 외할머니와 그 시절을 보내는 내가 다시 있을 것만 같다. 이제는 어른이 되어서 지하철 출근길 '환승'은 너무나도 쉬운 일이지만, 어른이 되고나서는 상계동에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같은 서울이고 한 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지금은 어디를 가야 또 그때처럼 설렐 수가 있을까. 독일도, 미국도, 프랑스도 알기 전, 나에게 가장 설레는 장소는 외할머니가 있는 '상계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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