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광화문
아파트 정문 앞 개나리벽이 내 걸음을 느릿느릿하게 만든다. 봄 옷을 살 목적으로 엄마와 구파발까지만 가기로 하고 집 밖을 나섰다. 마을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덜컹거리는 롤러코스터를 재미있게 타고 지하철로 환승했다. 일산에서 서울로 나가는 지하철은 그래도 밖이 많이 보이는 역을 지나쳐간다. ‘지하’철에서 바깥이 환히 보이는 창문을 보면서 엄마와 좋아하는 ABBA 노래를 실컷 들었다. 서로 가까운 귀에 이어폰을 끼어서 중간중간에 하는 수다를 ‘뭐라고?’하면서 잘 못 듣다가 나중에 깨웃음을 웃으며 서로 먼 귀에 이어폰을 바꿔 끼기도 했다.
햇살이 너무 좋아 엄마와 급 명동행을 결정했다. 그리고 갑자기 많아진 사람들 때문에, 또 오래 앉아있기도 해서 지루한 마음에 경복궁에서 또 급 하차를 결심했다. 재환이와 셋이 사진 찍은 출구를 지나 드디어 봄 햇살이 기다리는 경복궁으로 나왔다. 흥례문 앞 넓은 뜰에 무릎까지 오는 줄이 쳐 있길래 엄마와 깨방정을 떨면서 고무줄 넘듯 그 줄을 넘어 사람들 있는 곳으로 왔다. 그 줄이 쳐 있는 이유가 곧 밝혀졌다.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었다. 의도치 않게 시간을 딱 맞춰 왔다. 올해는 뭔가 되려나 보다. Sie wechseln die Soldaten des Palast라고 해야 하나?
광화문을 지나 스타벅스까지 엄마와 함께 걸었다. 많이 바뀐 광화문 앞이었지만 그 험한 길을 어쨌든 기분 좋게 걸었다. 내가 정말 자주 갔던 광화문 스타벅스. 스타벅스 일층에 있는 쪽문이 참 좋다. 안에서 그 쪽문 밖을 바라보면 작은 주차장과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봄 풍경을 딱 잘 나타내는 직사각형 액자 같아서 좋아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손에 들고 이제 좀 더 걸을 힘이 생겨서 소공동까지 걷기로 했다. 집회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사람들 틈을 잘 뚫고서 지친 걸음을 잠시 성공회 성당 골목길에서 멈췄다. 20대의 주말은 거의 광화문에서 보냈는데도 이 골목을 단 한 번도 들어와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대문 안에서만 학교를 다닌 엄마도 이 곳은 처음이라고 했다. 담벼락에서 사진 한 장, 그러다 경내로 들어가 햇살 한 번, 성당 문이 열려 있어서 그 안에도 한 걸음.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복잡한 덕수궁 앞으로 나왔다. 엄마랑 한 목소리로 이 곳도 제대로 보려면 하루가 꼬박 걸리겠단 얘기를 나눴다.
소공동으로 가는 을지로 지하통로. 옛 기억을 더듬어서 잘도 찾아갔다. 너무 더웠던 여름날에는 예배가 끝나고 정동에서 소공동으로 넘어갈 때 자주 이용했던 길이다. 조용한 지하통로에서 계속 피아노 조율하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도 나도 의아했는데 피아노 소리가 나는 계단이 있었다. 내가 먼저 솔파미레도, 엄마는 솔파 미레 도. 엄마가 신이 났는지 다시 도레미. 엄마와 계단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한바탕 웃었다.
롯데백화점에서 다시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출구를 잘못 나와서 덕분에 명동 골목골목을 지나 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에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 넓은 뜰에 봄햇살도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따듯했다. 그리고 때이른 목련이 활짝 피어 있었다. 우리 동네는 아직 꽃봉우리도 다 안 맺혔는데… 목련은 엄마와 나에게 특별한 꽃이다. 역촌동 외할머니 댁에 큰 목련 나무가 있었고, 내가 흰 목련을 엄마에게 가져 다 주면 엄마는 2층 테라스에서 눈이 오듯 내 머리 위로 꽃잎을 뿌려주었다. ‘눈이 온다~’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좋았고, 부드럽고 흰 목련이 머리와 얼굴에 닿는 게 좋았다.
벤치에 잠시 앉았다가 구파발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냉면집으로. 많이 걸었고 점심도 늦은 상태라 회냉면을 흡입하다시피 먹었다. 마지막 육수를 마시면서 그제서야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좋아하는 블루베리 그릭 요거트도 같이 먹고 다시 힘을 내서 쇼핑도 했다. 너무 내 것만 산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다. 돈을 많이 벌 때는 엄마한테 뭔가 선물하는 게 편하고 당연하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살짝 긴장을 하게 되는 모습이 속상했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건 아니니까. 무중력 상태를 견뎌야 내가 정말 가고 싶은 곳으로 점프를 할 수 있으니까.
집에 와서 엄마 밴드를 보니까 우리가 거의 만 오천 보를 걸었다. 엄마와 내가 지치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아마 아침에 먹은 메이플 시럽 때문이었을까? ㅎㅎ 언제 또 이렇게 엄마와 내가 여유롭게 광범위한 산책을 할까 생각이 들었다. 소소하게 지나가는 일상이 감사하고 또 감사한 요즘이다. 내 일상을, 그리고 우리의 일상을 사랑하면서 사는 게 제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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