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자석
시작은 그랬다. 엄마가 냉장고 자석을 다 떼어버렸다. 내가 발품 팔아, 출장 다니면서 하나씩, 한 장소에서 소중하게 모은, 남 주기도 아까운 자석들을. 공동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우리집 냉장고에 '대여'하고 있었던 건데, 엄마가 갑자기 자석을 모조리 떼어버렸다. 그래서 동생과의 미국행을 포기하고 내가 다시 가보고 싶은 그리고 내가 못 가 본 내가 좋아하는 유럽 도시들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늘 그렇다. 불평도 하면 안 되고, 늘 싸우면 나만 나쁜 딸이 되는 엄마가 늘 이기는 싸움.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기도 싫고, '늘 왜 그렇게 나를 긁어?'라고 묻는 것도 포기했다. 대신 빨대 없이 마셨던, 찬 기운이 그대로 남아 윗입술을 간지럽히던 텀블러 속 아메리카노 느낌이 신선했던 것에 소소하게 만족하고 기분을 풀려고 왔다. 매일 조금씩 글을 쓰게 되면 그게 저널일까? 오늘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어차피 일 하기 전 한 시간부터는 공부도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붕 뜨는 시간에 무언가라도 조금씩 적으면 쌓이는 게 있겠지라는 생각으로.
어제 퇴근하고 영화 '미스 포터'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중간쯤 조금 보다가 말야지 하다가 끝나는 줄도 모르게 끝까지 다 보게 되었다. 영화가 너무 잔잔해서 끝까지 클라이막스 없이 그렇게 끝을 모르게 끝났다. 자기가 찾아 독립한 그 곳 언덕에서 미스 포터가 잔잔히 글을 쓰면서 영화가 끝났다. 시달리고 지친 마음을 달래기엔 적절한 영화였다. 노먼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찾은 것 같았는데 연인의 죽음이 그 사랑의 완성을 가로 막았다. 식음을 전폐하고 방 안에 틀어박힌 것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림에 몰두하는 건 나로선 another level 같았다. 버틸 수 없어서 그림을 그리는 미스 포터. 결국, 작품 활동을 더 잘 할 수 있는, 노먼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곳을 찾아 미스 포터는 시골로 '틀어박혀' 버린다. 하지만, 그 곳에서 농장을 사고, 그림을 그리고, 친구를 만들고, 가족과 친구들과 다시 관계를 맺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게 독립이라고 생각했던 미스 포터. 부모님의 뜻이 아닌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려 했던 주체성과 자신감은 어쩌면 연인이 있음으로써 낼 수 있었던 목소리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첫 번째 독립이 좌절된 후에 비로소 아버지에게 'I must make my own way.'라고 말하는 미스 포터는 자신의 힘으로 얻은 시골 집으로 가구를 보내는 중이었고, 예쁜 드레스가 아니라 활동적인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결국, 두 번째 독립은 성공한다. 피터 래빗 그림에 'No tears!'라고 말해놓고, 혼자 울기도 하지만, 다시 자신이 만든 일상에 적응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마을에서 친구도 만든다. 잔잔하지만 툭, 툭, 한 걸음씩 용기있게 내딛는 미스 포터의 독립기를 보면서 나의 독립 계획을 막연하게나마 세워보기도 했다. 영화는 미스 포터가 마을에서 사귄 친구인 윌리엄과 결혼하기 전에 끝난다.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나무 밑, 혼자만의 장소에서 혼자만의 글을 쓰는 장면으로. 윌리엄과의 결혼에 대해서는 그 장면을 배경으로 자막으로 알려주며 영화가 끝났다. 그래야 '미스' 포터로 끝날 수 있으니까.
아직도 나는 내가 스물 두 살 같은데 몇 번의 계절을 겪고, 이렇다 할 나만의 역사가 될 사건을 몇 가지 겪으니 벌써 마흔 즈음이 되었다. 요즘들어 친척 모임이 잦았고, 가족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이미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룬 동생과 비교가 되곤 했다. 동생이 더 안정적으로 보인다며 아직 결혼 안 한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친척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 떠나는 나만의 진정한 독립을 하기 위한 준비 중이니, 본인만이 아는 잣대로 그렇게 비교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믿기지 않겠지만, 회사를 다닐 때보다 누릴 수 있는 건 적어졌지만, 작은 것들이 눈에 보여서 더 행복하게 되었다고. 누군가가 옆에 있을 때보다 외롭기는 하지만 나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직업에 묶어두었을 때의 나는, 그 직업이 가진 기준에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직업을 벗어나니 내가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더 좋아하고, 무엇을 잘 하며, 무엇을 두려워 하는지, 또 무엇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지 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를 키우고, 나랑 함께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즐기다 보면, 나도 '미스 포터'처럼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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