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이 1개월씩 밀렸던 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3월 월급이 최초 미지급된 후에 4월에는 3월, 5월에는 4월 급여가 지급되는 형식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넘어가고 있던 어느 날 친한 대리에게 밀린 월급에 대한 하소연을 하는데 뭔가 난처한 표정이었다. 알고 보니 전 직원의 월급이 밀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월급이 밀릴 것 같으면 경영지원팀 팀장님이 개별 알람을 주었는데 그때 강하게 안된다고 하면 지급이 되었다는 것이다. 경영지원팀 팀장님과는 입사 연도도 같고 해서 친하게 지냈다. 팀장님이 일일이 직원들 찾아가서 이야기하는 것이 안쓰러워 배려를 한답시고 크게 항의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회의실에서 조심스럽게 양해를 구했는데 나중에는 지나가면서 잠시 내 책상에 들려 통보하는 형식이었다. 나름 회사를 이해하려고 한 행동이 자발적 호구가 되었다. 자책 섞인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예전에 건강보험이 6개월째 미납 중이라는 고지서를 받은 적이 있다. 솔직히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회사 재정 상태를 대략 알고 있어 그냥 넘겼었다. 퇴사를 한 달 앞두고 납부 내역을 확인했는데 무려 11개월째 미납 중이었다. 6개월이나 11개월이나 미납의 사실은 같지만 그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간이 나오니 말문이 턱 막혔다.
회사에 최종 미납 시 근로자가 보호받을 수 있는 공문을 작성해달라고 했다. 요구사항을 메일로 보내라고 해서 보냈고 기다리라고 해서 한 달을 기다렸지만 답이 없었다. 오늘 다시 연락을 했더니 회사가 납부 이행하겠다는 문서를 써 줄 수 있지만 너무 당연한 소리인데 문서가 꼭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나보고 어떤 내용을 써 달라는 것인지 초안을 작성해서 보내 달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퇴사하고 3주가 지났지만 퇴직금이 입금되지 않았다. 앞선 퇴사자들이 제때 지급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으면 늦는다 연락한 통도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했더니 원래 퇴사 다음 달 말일 지급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팀장님, 그건 회사가 정한 일정이고, 원래는 14일 이내 지급이 원칙이죠. 그 이후에 지급될 경우는 근로자와 협의되었을 때만 가능한 거죠’라고 했더니 ‘아.. 그래’라며 말을 얼버무린다. (정말 몰랐나요?!)
사실은 익월 말 지급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계속 안 좋은 얘기로 연락하는 것도 미안하고 회사 어려운 것도 뻔히 알면서 재촉하기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호구가 되었던 그날의 내가 떠올랐다. 내 코가 석자면서 회사를 배려한답시고 또 설치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지급 하루 전에 지연 통보를 받을 것 만 같아, 기다리지 않고 미리 선수를 쳤다. ‘회사가 정한 익월 말은 꼭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권리를 양보하는 것이 배려인 줄 착각했었다.
회사를 좋아했다. 월급이 낮아도 복지가 미비해도 대표님, 이사님 인성이 좋고 수직적인 문화가 없어서 좋았다. 비합리적인 업무 분장도 과도한 업무 몰림도 언젠가는 알아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묵묵히 버텼다. 하지만 점점 회사는 실망스럽게 변해갔다. 그나마 명절에 주던 선물 비용을 아까워했고 일이 너무 많아 힘들다는 말에 야근을 안 하는데 정말 바쁘냐고 반문했으며 야근비, 철야 비 혹은 주말 특근 수당을 제대로 챙겨 달라는 요청은 외면했다.
꿈의 회사는 어디에도 없는 것을 알고 있다. 대신 나를 만족시키는 장점이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것이 ‘애사심’ 비슷한 감정이었는데 짝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회사를 떠날 준비를 했던 것 같다. ‘애사심’ 키울 시간에 외간 남자와 ‘썸’을 탔어야 했는데… 참으로 부질없는 감정이었다. 회사는 회사 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