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공항에서 아토차역으로 바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승차 위치를 몰라 헤매고 있었다. 우선 사람들을 따라 버스가 서있는 곳으로 갔다. 기사님께 ‘아토차역 가나요?’라고 영어로 물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가 내 앞에 쏟아졌다.
머리 위에는 물음표가 한 5개쯤 떠올랐고 몸은 얼어붙어 버렸다. 나와 기사님 사이에는 ‘아토차’라는 한 단어를 빼고는 그 어떠한 부분도 공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방황하는 눈동자를 눈치챘는지 이번에는 기사님이 천천히 다시 설명을 해줬다. 하지만 친절한 설명이 무색하게 나는 그 말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가여운 스페인어 들은 내 발 밑에 시체처럼 쌓여갔다.
출발 시간이 지난 버스는 나 때문에 요지부동. 하지만 기사님은 핸들을 옆구리에 끼고 틀어앉아 나의 안색을 살핀다. 국제적 민폐다 싶어 대충 알아들은 척하고 돌아서려는데 기사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더 큰 목소리로 손짓 발짓을 해가며 다시 설명을 해주었다. 어! 분명히 같은 스페인어를 나에게 던졌는데 이번에는 뭔가 손에 잡히는 것 같았다.
날아오른 단어들은 머릿속에 안착하더니 ‘여기는 아니고 아토차 역으로 가려면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버스를 타야 해’라는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것이 아닌가. 유레카.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었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서야 기사님은 몸을 돌려 핸들을 바로잡았다. Gratia. 기사님도 나도 활짝 웃으며 각자의 갈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정말 아래층에 가서 무사히 버스를 타고 아토차역으로 갔다.
스페인, 그러니까 세비야는 생각보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 큰 관광지나 유명한 레스토랑을 간다면 문제없지만 그들의 일상에 가까워진다면 영어는 무용지물이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스페인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정이 많고 호기심 풍부하며 친절하면서도 참견하기를 좋아하니까.
한 번은 구시가지를 벗어나 옆동네에 갔다가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아저씨에게 ‘알라마다 광장이 어디예요?’라고 물었다. 잘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하길래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갈려는 찰나. 친구들을 하나둘씩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무려 5명의 사람이 나를 둘러쌌다. 아니 그저 길을 물어봤을 뿐인데 대 토론이 장이 벌어졌다. 각자의 손가락을 여기저기를 가리키며 이방인의 길 찾기에 도움이 되고자 분주하다. 아 이런 사랑스런 소란스러움.
감사하게도 내가 겪었던 스페인 사람들은 대부분 밝고 흥이 많으며 경계심이 적었다. 하여 조금만 마음을 연다면 금방 친구가 될 수 있다. 이런 스페인 사람들의 특성은 민박집에 머무는 교환 학생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낯선 나라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는 스페인 친구들이 많았고 그 친구의 초대로 스페인에 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정열의 나라, 가우디의 나라, 미식의 나라 등등 다양한 이유로 스페인을 좋아한다. 그중에 최고는 언어의 장벽 따위 가볍게 넘어 30년 넘게 쌓아 올린 낯가림 따위 우습게 제치고 곁으로 쑥 들어오는 정감 넘치는 에스파뇰, 그 자체가 스페인의 가장 큰 매력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