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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작가 Apr 14. 2020

린다, 뽀르빠보르 (Linda, por favor)


>네가 나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이름을 물으면 ‘빅토리아’라고 대답한다. 한국사람이지만 스페인에서 영국 느낌 물씬 풍기는 이름을 사용하며 살기로 했다. 내가 생각하는 ‘빅토리아’라는 이름의 가진 에너지는, 진취적이고 당당하며 세련되면서 도도하다. 내가 가지지 못한 선망하던 이미지를 투영시킨 이름이다. ‘문정현’이라는 이름 안에 스며들어 있는 존재감 낮고 우울하고 초라했던 지난날의 ‘나’를 청산하고 다른 ‘나’로 거듭나고 싶었고 새로운 이곳에서 새로운 이름으로 출발하고자 했다. 


막상 손님들은 내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가끔 물어본 손님들도 ‘빅토리아’라는 외제 이름에 당황했고 대부분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아마도 살가움의 표현으로 이름을 물어봤을 텐데 본명이 아닌 닉네임을 말하는 나에게 거리감을 느끼거나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렇게 불리고 싶었다.


가장 많이 내 이름을 불러준 곳은 Cien montadito(100 몬따디또)이다. _ 스페인식 샌드위치는 크게 bocadillo(보까디요)와 montadito(몬따디또)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2개 모두 빵 사이에 하몽, 감자, 새우 등을 넣어서 먹는 방식은 같지만 bocadillo는 파니니 느낌의 크고 긴 빵이 주로 사용되고 montadito는 핫도그 빵과 비슷한 모양으로 bocadillo보다 작은 빵이 사용된다._


Cien montadito(100 몬따디또)는 말 그대로 100가지 종류의 montadito를 파는 식당이다. 우리네 김밥천국과 비슷한 느낌인데 스페인 전역에서 볼 수 있고 가격도 montadito 1개에 1~2유로 사이로 저렴해서 현지인도 여행자도 많이 이용하는 곳이다. 이 곳은 음식이 나오면 마이크에 대고 이름을 크게 불러준다.


“빅토리아 뽀르빠보르 (por favor : please)”


‘진취적이고 당당하며 세련되면서 도도한’ 내 이름은  작고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을 때 가장 많이 쓰인다.






> ‘린다’라는 친구


‘린다, 린다’

세계여행 중인 K언니 부부가 알려주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할아버지가 애타게 이름을 부른다는 것. 부를 때 특유의 리듬이 있다는 것. 그래서 본능적으로 따라 하게 된다는 것. 소리가 들려 창 밖을 잽싸게 내다봐도 볼 수 없었다는 점. 그래서 할아버지가 애타게 부르는 ‘린다’는 강아지일 확률이 높다는 것. 그렇게 우리는 미지의 ‘린다’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키워 나갔다.


어느 날, 쓰레기를 버리러 집 앞 공터에 나왔는데 어디서 개 한 마리가 귀를 펄럭이며 뛰어와 발랄하게 꼬리를 흔들며 관심을 표했다. 쭈그리고 앉아 귀여운 녀석을 격하게 쓰다듬고 있는데 멀찍이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 촉이 왔다. 할아버지가 지근거리에 왔을 때 녀석을 가리키며 ‘린다?’라고 물으니 살짝 놀라시며 ‘응, 린다’라고 대답하셨다. 늘 이렇게 사람을 보고 먼저 뛰어가서 할아버지가 애처롭게 이름을 불렀나 보다.


세비야에서 만난 개들은 교육을 잘 받아서 이방인의 추파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많은 거리를 함께 걸을 수 있고 야외 테이블에서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지만 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는, 쓰다듬기는커녕 눈 한번 마주치지 않는 귀엽고 멋있고 예쁘고 늠름한 녀석들을 지켜만 보는 건 고역이었다. 감사하게도 린다는 달랐다. 이름을 부르면 깡충깡충 뛰어와 한껏 애교를 피웠다. 그렇게 린다는 나의 ‘1호 개 친구'가 되었다.




>그 이름 함부로 쓰지 마오


K 언니 부부와 Cien montadito에 갔다. 여느 때와 같이 99번 핫도그와 콥 샐러드 Clara(끌라라: 레몬 탄산수와 맥주를 섞은 음료)를 주문했고 이번에는 특별하게 이름을 ‘린다’로 하기로 했다. 이름을 듣고 주문받는 직원의 옅은 실소를 보았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린다, 뽀르빠보르 (Linda, por favor)”


이윽고 이름이 불렸고 이후의 기억은 마치 슬로 모션처럼 흘러갔다. 마이크를 통해 이름이 울려 퍼졌고 나는 일어났다. 매장 안에는 약간의 웅성거림과 얕은 웃음소리가 퍼졌고 이름에 반응하는 동양 여자에게 시선이 쏠렸다. 뭔가 잘 못 되었음을 직감했지만 돌이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잽싸게 주문한 음식을 가져와 앉는데 옆 테이블 청년들과 눈이 마주쳤다. 뭐 야, 그 웃음 뭐 야.


검색을 해보니 ‘린다’는 ‘이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안 이쁜이라 웃은 건가?’라고 오해할 뻔했지만 스페인어 선생님인 H언니에게 물어보니 뜻은 맞는데 사람 이름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대체로 애완동물 이름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로 치면, ‘복실이’를 불렀는데 금발의 파란 눈의 외국인이 소고기 김밥을 받아가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떠나갈 듯이 웃었고 이 날을 두고두고 추억했지만 두 번 다시 ‘린다’라는 이름으로 주문하지는 않았다.




아쉽게도 린다는 시간이 지날수록 얌전해졌다. 여전히 우리에게 곁을 내줬지만 부산스러운 애교는 점점 보기 힘들었다. 린다가 ‘레이디’가 돼가는 중이라 그렇다며, 서운해하는 우리를 할아버지께서 달래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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