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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작가 Apr 22. 2020

12시, 도시가 촉촉해지는 시간


세비야 구시가지는 마차를 타고 둘러보는 ‘관광 상품’이 있다. 

중세 시대로 돌아간 듯, 어느 귀족의 피크닉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고 마차를 타지 않더라도 돌바닥에 울려 퍼지는 말발굽 소리는 도시에 깊게 빠져들게 하는 훌륭한 배경음악이 되어준다.


좋지만. 

말의 대소변이 길거리에 방치되는 불편한 상황이 동반된다. 소변은 흐르고 대변은 돌 틈 사이에 끼거나 다른 말발굽에 의해 짓이겨진다. 매일 관광객으로 들썩이는 도시답게 생활쓰레기도 무시할 수 없고 여느 유럽처럼 노상 방뇨도 자유롭다.


그렇지만. 

세비야는 깨끗하다. 쓰레기가 나뒹굴고 지린내가 날카롭던 유럽 어느 도시의 기억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그렇다. 누군가는 장기체류로 인한 콩깍지라 할 수도 있겠으나. 말똥도 지린내도 다음날이면 말끔히 지워진다.


비결이 있다. 

매일 밤 12시, 세비야에는 물 대포가 투하된다. 그저 얼룩진 한 부분을 위해서 뿌려지는 것이 아닌 소방호스처럼 뿜어져 나오는 수압으로 그날 쌓인 쓰레기와 이물질을 쓸어버린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간, 도시는 새로운 내일을 준비를 한다. 미간을 주름지게 했던 악취도 눈에 거슬렸던 이물질도 남기지 않으려 애를 쓴다.




도시를 통째로 물청소한다는 건. 

나에게는 상상 속 일이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 뇌를 꺼내 칫솔로 박박 문지르고 물을 뿌려 햇빛에 널어놓은 상상. 손댈 수 없이 더러워진 내 방을 뽑아 비눗물이 풀어진 통에 담가 빡빡 닦는 상상. 그런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는데 세비야는 그 어려운 걸 매일 밤 해내고 있었다.


반짝반짝 세비야. 

스페인 광장의 컬러풀한 아줄레주. 곧게 뻗은 히랄다 탑. 부드럽게 휘어지는 트램 길. 늦은 밤 물을 머금었던 도시는 작렬하는 태양에 수분을 날리고 이내 거대한 반사판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일까. 세비야에 대한 내 기억은 늘 눈부신 도시의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느 늦은 밤 귀갓길에 만난 그들은 나를 위해 물청소를 멈추고 길을 내줬다. 감사의 눈인사를 나누고 걸어가는 뒤로 다시 힘차게 내뿜는 물의 마찰음이 들려온다. 흩뿌려지는 물방울이 날아와 머리 위에 어깨에 살포시 앉았다 금세 사라진다.


12시. 

도시의 때와 악취가 사라지는 시간. 

그렇게 도시에 내려앉은 걱정도 근심도 다 쓸어버렸으면 좋겠다.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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