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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산 Aug 10. 2024

세상을 향한 말의 시작

군중과 방어기제

‘브런치 작가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산책 중에 확인한 메일 제목이 마음에 쏙 들어와 안겼다. ‘오구, 이쁜 것.’ 아이를 받아 안았을 때의 살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작은 희망 하나가 새로이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 후 한참 동안 글을 올리지 못하고 생활에 밀려 지냈다. 작가님의 서랍에 담긴 소중한 글을 발행하는 용기를 내달라고 브런치에서 재촉 겸 격려를 보내고 있었다. 틈틈이 쓴 글들이 있어도 현재 시점에서 독자에게 다가가기 위해선 점검이 필요할 터였다. 무슨 얘기부터 풀어야 할지, 내 안의 방어기제*가 허락할지 여러 고민과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첫 글을 올렸다. 난 ‘회피’의 방어기제를 분연히 떨치고 걸을 준비가 이미 되어있었다. 아니, 떨쳤다기보다는 설득했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지금도 내 안에 있으니까. 내가 그 아이를 인식하고 협상을 진행할 만큼 인생 짬밥이 생긴 것이다. 메인 화면에 노출되지도 않은 나의 글을 어떻게 알고 읽으셨는지, 하트를 눌러주신 분들이 계셨다. 이 세계에서는 이걸 ‘라이킷’이라고 하는구나. 익숙함 속에 약간의 낯섦이 있다는 건 적당한 흥분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여러 삶을 담은 글, 글, 글이 다가온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도 많고, 울림이 있는 글들도 많다.

   

막상 글을 쓰기 시작하자 여러 글감이 머릿속을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서로 먼저 나가게 해달라고 아우성치는 아이들처럼 이런저런 단어와 장면들이 머리뼈를 두드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하고 싶은 말이 이렇게 많이 쌓여있었나?’ 이 정도일 줄은 나도 몰랐다. 어느새 틈만 나면 글을 쓰고 싶어졌고, 수많은 말들을 어떻게 꺼내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래,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어디 터놓을 데도 없이 속으로 삼켜낸 순간들이 많기는 했었지. 나름대로 신에게, 가까운 이에게, 상담사에게 어느 정도 털어냈다고 여겼지만, 세상을 향해서 할 이야기가 많았던 거다.

   

“자, 조용조용! 차례차례 나가게 해 줄게.” 

곧 일상이 마비될 지경이라 갑자기 여기저기서 몰려온 내 마음속 군중에게 질서를 외쳐본다. 통할 리가 없다. 되려 비난 여론이 형성된다. “아니, 우리가 얼마나 오래 기다렸는데!!” 더 정중한 표현을 떠올려본다.

“내 그대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니, 진정하고 줄을 서시오!” 

사극 톤으로 예의를 갖추어 보지만 여전히 뚱하다. 

“그래, 답답했구나. 내가 다 나가게 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줄래? 나도 빨리 나가게 해주고 싶지만 벅찬 거 알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조금씩 수그러드는 군중들의 태도가 느껴진다. 나의 진심을 믿어주는 중이다. 한편에선 여전히 나가는 건 결사반대라고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그런데 군중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이 커지니, 그들의 목소리가 힘을 잃었다.


“이건 아니야. 우리가 허락한 선은 10명까지였다고!” 

“어쩌겠니? 10명 나가니 너도나도 나가겠다고 달려드는걸. 일주일에 2명씩 내보내는 건 어때?”

다시 회피라는 녀석과 협상을 시도한다.     

이렇게 오늘도 내 안의 거대한 군중의 무리와 방어기제들을 마주하며 글을 쓰고 있다. 회피와 성공적으로 협상이 타결되면 어디선가 다른 방어기제가 불쑥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른다. ‘아! 너도 있었어?’ 끝이 없는 과정이겠지만 즐길 것이다. 그들 모두 소중한 나의 한 부분이기에.


용어 설명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의 깊은 곳에 자리한 감정이나 욕구가 현실에서 드러나는 것에 불안을 느낄 때, 그 감정과 욕구를 처리하여 현실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심리적 기제. 적응적인 방어기제도 있으나 부적응적인 방어기제의 지나친 사용은 솔직한 내면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하여 성장을 방해하기도 한다. 무의식 중에 일어나기에 대게 스스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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