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차근, 성실하게, 즐겁게!
훈이 3품 승급을 위한 국기원 심사를 받게 되었다. 품이 올라가는 속도는 조금 더디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6년째 태권도를 다니는 훈은 태권도에 가는 생활 루틴에 익숙하다. 한 번 루틴이 정해지면 칼 같이 지키는 성격이기도 하며, 그만두겠다는 소리는 잘 하지 않는다. 본인에게 조금이라도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면, 웬만해선 계속한다고 한다. 이런 점들이 내가 비장애 아이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면모 중 일부다. 아빠를 닮아서 긍정적인 측면을 더 크게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 너무 긴장돼요.”
국기원 심사 일주일 전부터 아이가 평소 잘 표현하지 않던 긴장감을 드러냈다.
훈은 무대 체질이기에 대중 앞에 선 순간을 즐긴다. 초등학교 6학년 운동회에서 색종이로 직접 만든 왕관을 쓰고 음악에 맞춰 종일 신명 나게 춤을 추셨다. 당일에 내가 참관을 못 했지만 전화와 영상 제보로 훈의 활약을 알게 되었다. 운동회 날 아침, 햇볕이 따가울 것 같아 모자를 쓰고 가라고 권하니 눈살을 찌푸리며 마땅치 않다는 억양으로 “모자?” 했던 이유를 알았다. 사실대로 말하면 엄마가 말릴까 불안했나? 혹은 엄마에게 말하지 않고 간직하고 싶은 비밀이었나 보다. 이렇게 흥이 많고 무대 체질인 훈도 긴장을 하는구나.
“그냥 평소에 하던 대로 편하게 하면 돼. 실수해도 실수 안 한 것처럼 계속해!”
담담하게 몇 번 말해주었다.
국기원 심사 당일. 훈은 절도 있는 맺고 끊음을 보여주며 차분히 동작을 진행했다. 역시! 무대 체질!
‘느리지만 즐겁게, 꾸준히!’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성취 욕구가 큰 편이라 하는 일이 생각처럼 되지 않으면 힘들어하는 아이였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고, 계속하면 결국 쉬워진다는 말로 독려하며 이끌어주면 어려워도 해보려고 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정말 쉬워지고, 할 수 있게 된다는 경험치를 쌓아왔다.
이런 경험치가 또래 관계에서는 참 어렵다. 혼자 노력한다고 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난 사회성 발달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람마다 타고난 사회성의 색깔과 모양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칙을 준수하고 나와 남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는 예의와 배려. 이것이 최우선이며, 친구를 몇 명 사귀느냐 얼마나 사교적이냐 그런 건 개인에 따라 다른 부분이라 여긴다. 억지로 친구를 안 만들 이유도 없지만, 억지로 만들 이유도 없다. 또래들과 막역하게 지내기는 해도 아직 가까운 친구가 없는 훈도 자신의 때에 잘 맞는 친구와 우정을 이어나갈 수 있길 바란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 후 훈은 ‘학교가 어려워요.’라고 종종 읊조렸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아들의 서툰 행동의 맥락에 대해 반 아이들에게 설명해주고, 다소 거칠게 반응하는 아이에게는 다른 친구라면 그렇게까지 반응하지 않았을 행동도 훈이 하면 거칠게 대꾸한다고 지적해주시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과의 놀이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런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학년말 훈은 여자아이들이 서로 짝꿍을 하고 싶어 가위바위보를 하는 남학생이 되었다. 짓궂게 여자아이들을 괴롭히는 다른 남학생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훈훈한 시절이 있는가 하면, 떠올리는 것만으로 악몽이 되는 기억도 있다.
코로나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무렵이었다. 새 학년에 올라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학교에서 담임 선생님의 전화가 잦았다. 훈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수업 시간에 중얼거림이나 문제 행동도 부쩍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대체 이유가 뭘까? 여러 방법을 고민하며 선생님과 소통하였다. 통합 반 담임교사와 몇 차례 통화하던 어느 날, 아이가 국어, 수학만이라도 도움반에 갔으면 한다는 의견을 들었다. 아이에게 교과적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닌, 교실에서 담임교사가 감당하기가 힘드니 짐을 덜고 싶다는 의미로 들렸다. 학기 초 개별화 교육 회의 때는 완전 통합을 하기로 했던 상황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집에서 아이는 예전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단지 새로운 음성 틱이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예전에도 틱 증상이 간간이 나타나곤 했기에 유심히 지켜보는 중이었다. 얼마 뒤 담임교사는 아이가 누가 안 보면 다른 아이들에게 갑자기 다가가 위협이 될만한 행동을 계속해서 온종일 옆에 사람을 붙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뭐라고?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거지?’
코로나 때 집에서 착실하게 자기 할 일을 해냈으며, 또래에게 다가가는 방법이 서툴러 상대가 불편을 느낄 때도 있지만 악의적으로 누구에게 해를 끼칠 아이가 아니었다. 들으면서도 믿어지지 않고 남의 집 아이 얘기처럼 들리는 이야기에 난 “입학하고 지금까지 실무사 선생님 도움을 받은 적이 거의 없는데요? 갑자기 옆에 사람을 붙여야 한다고요?”라고 당황스러움을 표현하였다. 담임교사는 내 말을 실무사 선생님을 붙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해석했던 것 같다.
며칠 뒤 아이와 관련해서 회의가 필요하다며 학교에 방문해 주기를 요청하여 학교에 갔다. 특수 교사 두 명과 담임교사가 앉아 있었다. 교감 혹은 교장 선생님도 오려고 했는데 급한 일이 생겨 못 왔다고 했다. 회의 시작부터, “○○이의 인권도 중요하지만, 다른 아이들의 인권도 생각해야 한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마치 내가 자기 애 옆에 보조 선생님 붙이는 걸 싫어해서 다른 아이들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분위기를 몰아갔다. 중간중간 내가 하는 문제 제기나 의문에는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얘기했다.
그래, 알지 나도. 현재 공교육 통합 교육 시스템 부실한 거. 그래도 교사가 당당하게 “할 수 없어요.”라고 얘기하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마치 전쟁 예고도 없이 적이 쳐들어와서 1:3으로 싸우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에 회의 결과에 대한 서명까지 받았다. 내가 오기 전에 오늘 반드시 아이 옆에 보조 교사를 붙여 감시하겠다는 다짐을 확실하게 받아내야 한다고 서로 합의라도 한 것처럼.
나는 회의라고 하기에 전화로만 의논하기에 불충분하므로 직접 아이의 학교생활에 대해 구체적인 정황을 듣고 파악할 수 있는 자리인 줄 알았다. 전화로만 듣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아이의 학교생활을 직접 만나서 듣고 싶었다. 해결 방안도 함께 찾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은 회의가 아니었다. 죄인 취급이었지. 그럼 그 지경이 될 때까지 학교에서 한 일은 대체 뭐란 말인가? 교육부 민원의 답변에서 말한 ‘통합교육지원단’이란 구색 맞추려고 지어낸 유령 집단인가?
아마도, 문제가 커지지 않도록 잠재우려 애쓰며 각자 나름대로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아이의 큰 변화에 대해 근본적인 원인을 파악하고 거기에 맞게 중재하려고 하진 않았다. 학교에서는 집에서와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어마어마한 음성 틱이 나타나고 있었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았다. 아이의 불안 정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전조 증상이 있었다. 누구도 내게 아이에게서 이전에 없던 틱이 관찰되고 있고 굉장히 심각해졌다고 말해주지 않았었다. 새로 전학 온 아이도 아니고 같은 학교를 5년째 다니고 있는 아이였건만, 전과 다른 변화를 상세히 알려주고 해결책을 모색하여 나와 깊은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다른 학부모들의 민원이 거세지자 발등의 불을 끄는 데만 급급했다.
회의 자리에서는 나의 불편한 감정을 다 얘기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이 탓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에서, “저도 지금까지 참아온 것이 많습니다.”라는 한마디만 하였다. 주말 동안 아이에게서 들었던 찜찜한 이야기들, 선생님들에 대해 언급하는 아이의 불만에 찬 말투를 생각했다. 단 한순간도 편안히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이 되자마자 학교를 찾아가 교장, 교감 선생님과 면담했다. 격한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내가 원하는 해결 방향에 대해 말씀드렸고, 담임 선생님께서 애를 많이 쓰고 계신 것 같지만 혹시 방향이 잘못되어 서로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닐지 걱정된다고 우려를 표했다. 지금 떠올리면 더 지혜롭게 말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아쉬운 마음도 든다. 회의에서 느꼈던 부당함, 일을 키우기 전에 충분히 대화하고 조율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 그 모든 서툰 과정에 대한 책임을 아이의 기질 탓으로 돌리려는 것처럼 보였던 분위기… 반도 표현하지 못했다.
그들이 악해서 그런 건 아니라 생각한다. 시스템의 한계 안에서 노력도 많이 했다는 걸 안다. 그 부분에는 감사한다. 그러나 서툶과 오해, 어긋난 노력이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었다. 이 글을 쓰려고 마음먹기만 했는데도 당시와 비슷하게 숨이 차고 가슴이 답답한 증상이 계속되었다. 내 감정에 대해서 충분히 끌어안고 다독거리지 못하고 지나왔기 때문이겠지. 들추지 않고 먼지 쌓인 기억 창고 맨 안쪽에 밀어놔야 맞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묻어 두면 언젠가 일상의 다른 장면에서 흉하게 터져 나올 고름이 될지 모른다.
코로나의 막바지 절정이 지나고 학교 수업이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갔던 초반. 아이들은 늘어난 수업 시간에 버거워했다. 특수교육대상자 아이들은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차츰 등교 일수를 늘린 후 수업 시간을 서서히 조정하는 등의 중간 과정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교과보다는 코로나 시기에 느꼈던 점들을 서로 나누고 부족해진 사회성 기술을 다루는 시간을 먼저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코로나 팬데믹은 모두에게 처음이었기에 서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는 된다.
훈아, 지금처럼 차근차근, 즐겁게 배워가렴. 서로 다가가는 세상을 향한 발차기를 힘껏 날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