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노하우 엄마표 교육
훈과 대학 병원 정기 진료에 다녀왔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방문하여 의사의 의견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소아정신과 의사가 치료법을 가진 것도 아니고, 내 아이의 세세한 면모는 내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렇지만 자폐 스펙트럼 대상자의 아동기 이후 긴 생애 주기마다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 사건 사고, 대처 방법 등에 대해 폭넓은 간접 경험을 해온 의사의 축적된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긴 기다림 끝에 진료실에 들어가면 의자 세 개가 있다. 보호자와 진료 대상자가 함께 앉아 의사와 상담을 한다. 예전에는 이런 상황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이가 말귀를 알아듣고 생각하는 시점이 되면서부터 신경이 쓰였지만 대학 병원의 빡빡한 진료 일정상 보호자와 대상자를 따로 면담하는 건 어려워 보였다.
‘그 말을 해야만 하나요?’하는 것 같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곁눈질하는 훈이 얼핏 느껴졌었다. 엄마도 이게 무척이나 난처하고 가시방석 같은 상황이란다, 아들아….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사전에 아이와 상의해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무엇을 물어보고 싶은지 정리한 후 가면 좀 나을까? 아이에게 병원에 오는 이유에 대해 두루뭉술하게 설명해 준 적은 있었지만, 조금 더 크면 또 다른 질문을 할 수도 있겠지. 그때는 어떤 설명을 해줘야 할까? 의학적 진단명은 어디까지나 의사들 입장의 분류이므로, 개인의 정체성 차원에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겠지? 이 부분에 대한 답도 조금씩 더 다듬어야겠다.
사실 이런 설명은 아이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필요하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장애 이해 교육’과 비슷한 개념이다. 장애 이해 교육, 실은 이 용어도 난 별로다. ‘장애’라는 틀로 한 인간을 설명한다는 것은 단어 안에 사람을 가둘 여지도 존재한다. 친구 이해 교육, 다양성 이해 교육 등, 더 좋은 표현이 있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대한민국에는 아직 비장애인과 함께 살아가는 현장을 고려한 맞춤형 발달장애 이해 교육이 존재하지 않는다(서울 기준, 혹시 지방에 있다면 죄송).
어떻게 알았을까?
통상적으로 학교에서는 1년에 두 번 정도 ‘장애 이해 교육’을 한다. 일반적인 발달을 하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이 교육에 대해 별생각이 없겠지만, 나로선 해도 불안하고 안 해도 불안한 교육이었다. ‘불편하지만 다르지 않아요.’로 접근할 수 있는 지체 장애와 달리, 단순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뇌신경 발달장애에 대해서는 자칫 잘못 설명하면 역효과가 더 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하는지 부모에게 전달되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으니 불안감이 더 크다. 어쩌면 뇌신경 발달장애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을지도 모른다.
집 바로 옆에 청각장애 전문 복지관이 있다. 이곳에는 통합 학급에 있는 청각장애 학생들을 위한 통합지원 프로그램이 있다. 상담을 통해 보호자와 욕구, 지원의 방향 등을 충분히 협의하고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1년에 진행비 6만 원으로 이런 프로그램을 지원하다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장애 이해 교육은 물론이고 또래 관계 개선 프로그램, 교사 상담도 진행한다. 그런데 이런 프로그램의 지원을 원치 않는 경우도 많았다. 아이가 장애로 주목받는 데 대한 부담 때문이다.
사실 청각장애가 있어도 어린 시절부터 재활이 잘 되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다면 세심한 지원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보청기를 하거나 인공와우 수술을 한다고 해서 모두 구어(음성을 표현 수단으로 하는 언어)로 의사소통을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청각 손상의 원인이 다 다르고 개인마다 다른 여건을 갖고 있기에. 재활이 잘 된, 일반적인 발달을 하는 청각장애 아동은 ‘불편하지만 다르지 않아요.’를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종류의 장애 이해 교육은 수없이 많이 이루어져 왔고, 이제 그 메시지를 어느 정도 받아들인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청각장애가 있으면서 약간의 자폐 스펙트럼 증상이 있고 발달이 느린 아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지역아동센터에서 큰아이가 또래에게 서툰 방법으로 다가가며 오해나 갈등이 생겼을 때, 아이뿐 아니라 주변 또래들에게도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들의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반응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여러 군데 단체를 알아보았지만 서로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떠넘겼다. 여긴 이래서 어렵고, 저긴 저래서 어려웠다. 사춘기 소년의 특성을 고려한, 또래 관계 개선을 목표로 한 교육을 “저요!” 손 들고 맡아 주는 기관이 없었다.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도 함께 알아보셨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었다.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친절히 메일로 보내준 기관도 있었지만, 제작된 지 오래된 느낌이었고 개념적인 설명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내가 만들까?’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낯설지만은 않았다. 결국 내가 강의 자료를 만들고, 기관장 선생님(교회 사모님)께서 강의를 맡으시기로 했다.
자, 이제 엄마표 다양성 이해 교육 프로젝트 시작!
신경 다양성이란 자폐 스펙트럼이나 ADHD, 학습장애, 지적장애 등 기존에 장애로 인식되던 것들을 증상이나 질병으로 규정하지 말고, 뇌신경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생물적 다양성으로 인식하자는 개념이다. 일반적인 양상의 발달을 보이지는 않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기회와 지원이 제공될 때 자기 몫을 해낼 수 있는 사람.
최고의 전기자동차 브랜드로 잘 알려진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자폐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으며, 수영 금메달리스트인 마이클 펠프스는 ADHD였다. 그런데 단지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힘들었다. 일상생활 기능이 좋고, 평균 이상의 지적 능력을 지닌 자폐 스펙트럼을 임상에서는 고기능 자폐, 아스퍼거 등으로 부른다. 공식 진단명은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기능이 높아도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기본적인 사회성 기술들을 부단한 노력으로 일궈가는 과정이 따른다.
지적장애를 동반하거나, 일상생활 기능 습득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노력해도 평생 구어로는 의사소통이 힘들어 보완 대체 의사소통 방식(수어, 그림이나 기호를 누르는 방식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장애인의 가족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발휘했던 인내심을 모두 집약해 몇 배로 부풀린 인내심이 필요할 수도 있다(내 기준에서). 장애 당사자도 마찬가지다. 그들로서는 몹시 불편하고 껄끄러운 세상살이에 적응하고 인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양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기, 중요하다. 그런데 ‘어려움’이라는 관점 역시 필요하다. 그들이 독특하고 때론 보기에 불편한 행동을 하는 것, 피해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들이 나쁜 의도보다는 뇌신경 연결에 부분적인 어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필요했다.
그래, 동물과 구분해 주는 인간 고유의 뇌인 ‘대뇌 피질(전두엽, 두정엽, 측두엽, 후두엽)’의 기능을 간단히 설명하고 특정 피질 영역이 손상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이 무엇일지 예측해 보는 시간을 갖자.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 사소해서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일들, 실은 아주 복잡한 뇌신경 세포 연결의 결과로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자. 그 복잡한 신경 연결의 아주 작은 한 부분만 구멍이 나도 전혀 다른 결과가 발생할 수 있음을 설명하자.
의학적 진단명으로서의 장애(Disorder)는 신체나 정신 능력에 결함이 있는 상태로써 특정 영역에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만, 환경적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결과적으로 발생하는 장애(Disability)는 개인과 사회 모두의 문제이다. 장애 진단은 낙인을 위한 것이 아닌, 환경적 지원을 위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폐 스펙트럼의 핵심적인 특성을 알려주고 일상에서 그 특성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는지 예시 화면을 통해 이해를 도와야 했다. 고민하다 생각난 인물은 바로 ‘우영우’였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라는 드라마를 통해 요즘 아이들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 비록 자폐 스펙트럼의 극소수에 불과한 ‘서번트 신드롬(savant syndrome)’*을 가진, 기능도 뛰어나고 외모도 사랑스러운 다소 비현실적인 가상 인물이지만 드라마의 장면 중에는 자폐 스펙트럼의 특징을 잘 표현하는 장면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우영우는 상황에 적절한 말 표현이 어려울 뿐이지, 고급 어휘를 많이 알고 문장력도 뛰어나니 언어 습득이 더딘 다수 자폐인의 특징이 설명이 안 되네? 영상을 뒤져 그 특징을 설명할 수 있는 아이가 출연하는 공개 영상의 한 구간을 선택했다. 중요한 건 그들의 특징이 그냥 이상한 행동이 아닌, 모두 나름의 맥락이 있는 행동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현실에서 자폐 스펙트럼은 무지개처럼 여러 색깔과 농도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음을 짚고 넘어간 후, 평등의 개념을 ‘Equality’와 ‘Equity’로 구분하여 제시했다. 쉽게 설명하면 ‘Equality’는 모두에게 같은 걸 주는 것이고, ‘Equity’는 개인별 특성에 따라 그에 맞는 걸 준다는 개념이다.
‘Equality’ 평등이 나쁜 것은 아니다. 흑인과 백인의 차별을 말할 때, ‘똑같은 권리’가 강조되어야 할 때 ‘Equality’를 사용한다. 그러나 같은 조건에 맞추려 할 때 오히려 불평등해진다면 ‘Equity’의 평등 개념이 필요하다. 그림으로 보면 더 간명해진다.
신경 다양인도 신경 전형인(일반적인 사람)처럼, 본인에게 적합한 학습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면 발전할 수 있다. 격려, 학습 및 놀이 기회, 운동 등,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다름을 이유로 교육 기회가 줄어드는 현실 때문에 넣었다.
신경 다양성을 가진 이들과 지내면서 갈등이 생길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상황별 예시를 통해 생각하고 의견을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았다. 우영우는 극적으로 설정된 캐릭터이다. 자폐인을 편견 없이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영우의 주변 사람들 같은 이도 많지 않다. 제대로 배운 적 없고, 알지 못해서 그렇다. 도전 행동(문제 행동이라고도 하는, 발달장애인들의 자해나 타해 행동)이나, 의사 표현 방식이 서툴러 빚어지는 다양한 갈등과 오해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했다. 나의 입장과 너의 입장을 함께 생각하기! 정답은 없다. 생각해 보고, 배려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신경 다양성 이해 교육의 효과는 무엇이었을까?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아이들이 전에는 훈이 하는 말을 흘려듣기 일쑤였는데, 강사 선생님께서 눈을 바라보고 경청하며 반응해야 한다고 해서 이제는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듣는다고 하셨다.
교육 자료는 아무래도 훈의 특성에 맞추어 제작했다. 통합 환경에서 장애 이해 교육을 하더라도 신경 다양성의 예는 너무 광범위하기에 꼭 맞춤형 접근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직은 또래 무리에 자연스럽게 끼어 이야기 나누고,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어렵지만 ‘쟤도 다 사정이 있고, 많이 노력하고 있구나.’라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다. 너무 큰 욕심일까?
진행비 낼 테니까 전문 기관에서 맞춤형 통합지원 좀 부탁드려요! 네? 관계 부처 예산 지원도요!!
참고 자료
[뇌교육 칼럼] 신경다양성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
https://www.brainmedia.co.kr/MediaContent/MediaContentView.aspx?contIdx=24015
용어 설명
*서번트 신드롬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중 기억, 암산, 미술이나 음악 등 특정한 분야에서 출중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