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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가르치는 아이

by 해산

나를 깨우쳐준 너에게


너는 하얀 피부에 깡마른 아이였어. 가끔 위장이 뒤틀리면서 토하는 일이 생겨 나중엔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말라 보였지. 시원스레 활짝 웃는 표정이 멋졌어. 개구진 웃음을 지으며 갑자기 코앞으로 너의 얼굴을 들이밀 때는, 의사소통만 잘 되었으면 친구들하고 장난도 치고 인기도 많았을 너의 모습을 상상해 보기도 했단다.

안타깝게도 넌 뇌가 가질 수 있는 대부분의 아픔을 모두 가진 것처럼 보였어. 수시로 일어나는 발작에 생명을 잃을 뻔한 적도 있었고, 여기저기 부딪혀 그 하얀 얼굴이 늘 멍과 상처투성이였지. 발작이 유발하는 뇌 손상으로 배운 내용도 잊어버리고 기억 못 할 때가 많았어. 또 다른 어려운 점은 네가 위험 상황에 대한 인지를 거의 못 한다는 거였지. 높은 곳에 있는 장난감을 꺼내려 의자를 가져오는 것과 같이 목적을 위해 수단을 이용할 줄 아는 너였지만 차가 달리는 도로를 살피지 않고 그냥 달려 나가기도 하고, 높은 교구장 위로 기어오르다 떨어진 장난감에 머리를 맞고서도 바로 다시 기어오르기도 했었어.


그런 점 때문에 너의 어머니는 늘 네가 어딘가에 부딪힐세라, 다칠세라 긴장한 모습이었어. 키가 크고 힘은 세고, 동작도 빠른데 하는 행동이 한창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마구 뛰어다니는 2~3살 아기와 같으니 어머니가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할 수밖에.

그렇지만 너의 어머니는 한 번도 너를 향해 찡그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어. 늘 너를 존중하는 말투로 너의 급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타일렀지. 너를 보살피며 몸도 고단했을 테고, 세상의 냉대에 눈물짓는 일이 많으셨을 거야. 그래도 많은 사람에게 하루도 빠짐없이 묵상 메시지를 보내고, 다른 힘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분이셨지. 너는 어머니에게 고통만 준 것이 아니라, 아마도 현실을 초월한 깊은 소망과 베풀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선물한 것 같아.


내 아이들의 불편함을 알게 되었던 순간보다 더 신이 원망스러웠어.

'대체 왜! 이런 경우를 왜! 겪게 하시나요?' 소리치고 싶은 의문이 뼛속에서 메아리쳤어.

'무책임한 사람(?) 같으니.' 화도 나더라고. 그런데 이분이 너무나 태연한 목소리로 답하시는 거야.

'너 보기엔 뭐가 그렇게 달라 보여? 내 보기엔 거기서 거긴데?'

이 대 환장 답변을 어쩌면 좋니?

'같다니, 뭐가 같아요!!! 그냥 순조롭게 태어나 사랑만 주면 알아서 잘 자라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고 잘 먹고 잘 사는 사람하고, 매일 발작하고 똑같은 내용 계속 배워야 하고, 몸은 늘 부딪혀 상처투성이인, 부모 외에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하고 대체 뭐가 같나요?' 따질 수밖에 없었어.




한참 후에 난 그 답변을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도 같았어.

언젠가 너와는 기능적인 면에서 많이 다른 아이가 찾아왔었단다. 치료실에 그런 아이가 온 것이 처음이었지. 들어오자마자 누구도 꺼낸 적 없던 연산 보드게임을 꺼내, "이거나 한 판 하죠."라고 제안했어. 연산에 능숙했던 그 아이는 내가 그 게임이 익숙하지 않은 걸 눈치챘던 것 같아. 선생님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더니 어떤 것을 선택하라고 훈수를 두었어. 그런데 난 그 수가 나에게 불리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있었지.

"그렇게 하면 내가 지잖아."

"에이, 들켰네. 이기려고 했는데."

그 아이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함께하는 잠깐의 시간 동안 난 느꼈어. 주변 아이들이 잘 모르고 더딘 것을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이용할 줄 아는 아이라는 걸. 인지 기능이 높은 아이였지. 그건 악한 것도 아니고, 아이에게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야. 본능이랄까? 그렇게 자신이 이득을 본 경험이 많았고, 아무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해주지 않았던 거야.


그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의 미세한 발음 오류가 마음에 내내 걸려 치료받고 싶다고 하셨어. 그 정도로 정교한 발음 치료가 가능한지 물어보시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았지.

"저희 애가 그냥 뛰어난 게 아니고 아주 머리가 좋은 애거든요." "여기 어떤 애들이 와요? 치료할 수 있는 교재는 있나요?"

발음 오류가 마음에 걸릴 수도 있고 기왕 돈 내고 치료받는 거 내 아이에게 맞는 선생님과 환경을 찾으려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해. 그런데 말이야, 난 그 아이에게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고 해서 틀린 답을 알려주면서 이기는 승부는 옳지 못하다는 말을 먼저 해주고 싶더라고. 어머니한테 발음보다 그 부분을 먼저 짚어주셔야 할 것 같다는 말씀은 끝내 드리지 못했어. 머리 좋은 자식에게 한 치의 허점이라도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신 것 같았거든. 그 어머니도 자식을 위해 누구 못지않게 노력하는 분이셨으니까, 무엇이 더 중요한지 깨닫는 순간이 올 것 같긴 해.


부족한 교사한테 늘 웃으며 따뜻한 차 한잔하시라고 음료를 건네시는 너의 어머니가 오늘보다 내일 더 평안하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어. 널 만나지 못했다면 난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었을 거야. 넌 여전히 도전해야 할 사랑이 남아있음을, 한 차원 높은 사랑 앞에서 난 여전히 배워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었어. 그리고 누구보다 해맑고 순수한 웃음으로 늘 내 실수를 용서해 주었지. 찢기고 부딪히면서도 금세 벌떡 일어나 네 갈 길을 가는 널 보며, 누가 너처럼 강인한 삶의 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했단다.

너도, 그 아이도 신 앞에서는 각자의 온전한 삶의 이유가 있겠지. 각각 필요한 돌봄이 다르고, 그것을 우리가 모두 인정하며 보듬어가야 할 거야. 너는 이 땅 위 짧은 생애 동안 누구보다 불리한 조건을 안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원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보고 있는 그분의 시선은 다르겠지. 그렇게 티끌만큼 이해를 해보려 해도 여전히 심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네.


너의 하얀 피부에 상처와 멍이 없는, 장난기 서린 시원한 미소만 빛나는 그런 날을 보고 싶구나. 살도 토실토실하게 오르고 "선생님, 게임이나 한 판 하죠."하고 말도 걸고, 차례 지키면서 게임도 하고, 그런 날이 언젠가 오겠지?

네가 어른이 되면 살 곳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는 것이 아니라 집과 가까운 곳에 네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낼 장소가 있었으면 좋겠다. 너의 특성을 배려한 환경 속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내고 누군가와 소통하며 배우는 날들이 이어지길 바라. 사회적 시스템이 너와 너의 가족을 보호하고 너는 날마다 누군가에게 웃음과 용서와 사랑, 용기를 가르치면서 살아갔으면 해. 우리 건강하고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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