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이면 충분하다, 김영미 지음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모여서 된다.
‘페이지’ 이 말의 어원인 ‘파구스(pagus)’는 밭이라는 뜻이다. 농사짓는 농부가 한 고랑 한 고랑 밭을 갈듯이, 정성을 다해야 뿌린 것을 거둘 수 있듯이 책이란 정직하게 뿌리고 거두는 것이란 의미라 한다. 그러니까 책을 쓰는 일이란 하루하루 자기 삶에 충실한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 날부터 매일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를 재우고 작은 방으로 건너와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 무언가를 매일 남긴다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에 더 큰 매력이 있었다.
바스락 거리는 작은 소리조차 소음이 되는 혼자만의 새벽을 즐기다 보면 지금 이 순간, 시간이 나를 위해 멈춰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다른 소리들이 다들 숨죽여 주는 그때야말로 내 안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한 번도 쓰는 일을 업(業)으로 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어쩌면 쓰는 일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게 그저 익숙하고 편한 것이었다. 타인의 눈치를 살피고, 남의 시선에 유독 민감한 나였지만 내 글을 내보이는데 만큼은 너그러웠다. 이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글은 잘 쓴다 못 쓴다는 평가가 어렵다고 믿었다. 살아온 시간의 차이, 경험의 차이, 정성의 차이 그도 아니면 그 순간에 지나간 감성의 차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내가 만든 모형을 남들 앞에 내놓기는 부끄러웠지만 내 글은 달랐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다고 내보이기가 조금은 편했다. 아니 조금 덜 부끄러웠다. 그저 사소한 내 이야기였으니까.
어쩌면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하루에 한 번, 하루에 두 번, 하루에 여러 번씩 머리에 스치는 요즘. 책 쓰기 비법을 알려주는 자기계발서보다 하루를 충실하게 살아내는 법에 대한 이야기에 더 눈이 간다. 글을 쓰고, 책을 쓰는 일은 몇 가지 기교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믿기에. 내 삶이 내 글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간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