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의 담뱃불.

퇴사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시선.

by 수련화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이 있다.
어떤 이는 그 문턱을 넘을 자신이 없어 퇴사 의지가 조금 사그라들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 문턱 앞에서 더 큰 좌절을 맞이하기도 한다. 누구나 고민해 봤을 법한 마지막 고비.
바로 부모님께 퇴사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이다.

퇴사 면담을 할 때,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으레 이 질문을 받게 된다. 내 경우에도 퇴사 면담을 시작했던 첫 질문으로 기억한다.
"남편이랑은 다 이야기된 거야?"
"와이프는 알고 있어?"

만약 퇴사자가 미혼이라면 퇴사 면담의 시작은 이 질문으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님은 알고 계시고?
뭐라고 안 하셨어?


우리 부부에게도 피할 수 없는 그 순간이 다가왔다. 남편의 퇴사를 시아버님께 알려야 하는 순간. 물론 아버님의 의견을 여쭙고 퇴사 여부를 결정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남편은 지난달 말에 퇴사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퇴사의 절차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마지막 관문 같은 느낌이었다. 남편은 무덤덤했지만 내 멘탈은 또 일찌감치 바스락 거리고 있었다.

남편은 집안에서 무뚝뚝하지만 든든한 장남이었다. 학창 시절 한 번도 허튼 행동을 하지 않은 모범생이었다며 아버님은 내게 자랑하시곤 했다. 반대로 아버님은 그다지 가정적인 분은 아니셨다고 한다. 친구가 좋았고, 술이 좋았던 젊은 시절. 당신께서 집안을 돌보지 않았던 그 시간 동안 무탈하게 자라준 큰 아들. 좋은 대학을 별 탈 없이 졸업한 것은 물론이요, 대기업에 들어가 10년 가까이 묵묵하게 다니는 모습이 아버님 눈에는 얼마나 든든하고 자랑스러웠을지 말하지 않아도 그 믿음과 신뢰가 느껴졌다.

남편은 혼자서 아버님을 뵈러 내려가겠다고 했다. 지방에 계신 아버님을 뵈러 같이 가야 하는 게 아닌지 재차 물었지만, 제법 배가 불러온 나까지 데리고 내려가서 퇴사했다고 말하기가 내심 맘에 걸렸던지 굳이 혼자 내려가겠다고 했다. 소주 한잔 기울이며 남자들만의 대화를 통해 소식을 전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난 더 이상 같이 가겠다고 떼쓰지 않았다. 한 번은 지나야 할 관문이었다.

남편이 아버님과 저녁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편하게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괜히 방해가 될까 봐 카톡 메시지도 보내지 못했다. 그저 물끄러미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둘이서 수많은 날을 고민하고,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음에도 부모님께 퇴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나 보다. 실망하시지는 않을지, 어떻게 생각하실지 별의별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남편에게 걸려온 전화.
남편은 조금은 당황한 듯, 맥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빠는 내가 회사에서 잘린 줄 알아.
아니라고 했는데도
안 믿는 눈치신데?!
아직 10년도 채 안 다녔는데... 하시며
목욕탕 다녀온다고 나가셨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시나리오.
왜 나왔냐, 뭐 하려고 그러냐, 대기업이 얼마나 좋은 곳인데 그러냐... 이런 류의 질문을 던지실 줄 알았더니 회사에서 잘렸다고 생각하신다니. 역시 우리 아버님의 클래스는 저~ 쪽 먼 곳에 있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 한 편으로는 왠지 모를 서운함이 밀려왔다. 당신의 아들이 그 정도밖에 안된다고 생각하신 건가. 난 우리 남편이 회사에 얽매이기엔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이라도 열정이 있고 젊을 때 더 큰 일을 해보라고 응원했던 건데. 회사에서 내칠 만큼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던 건가. 짧은 순간에 수많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밀려들어서 전화기에다 대고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나도 남편과 함께 그저 맥없는 웃음만 지었다.


하기야 아버님이 생각하시기에 대기업은 내 발로 나올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다. 안정적인 인생을 담보해주는 보증수표 같은 곳이라 생각하셨을 거다. 탄탄한 회사에서 주는 안정적인 월급, 아버님을 포함한 그 당시 어른들은 대한민국은 망하더라도 S그룹으로 대표되는 대기업들은 망하지 않을 거라며 굳은 신뢰와 믿음을 내비치셨다. 그런 대단한 회사를 아들이 박차고 나왔단다. 결혼도 했고, 곧 아이의 아빠도 되는 당신의 아들이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했을 리 없다고 순간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다.

아버님은 목욕탕에 다녀오시는 길에 맥주랑 오징어를 사 오셨단다.
남편은 회사에서 잘린 게 아니라 내 발로 나온 거라며 열심히 설명을 드렸다는데, 그곳에 있지 않았던 나로서는 무거운 공기의 흐름까지, 아버님의 안타까운 숨소리까지는 읽을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저 남편이 괜찮다고 하니 괜찮은 거라고 믿는 수밖에.

아버님은 오래도록 피워왔던 담배를 1년 전쯤 끊으셨다. 요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손녀 보는 낙에 하루하루를 사시는 아버님. 시누이가 자꾸 담배를 피울 거라면 애기 옆에 오지 말라는 엄중한 접근 금지령을 내린 순간, 아버님은 할아버지가 된 대가라며 단칼에 담배를 끊으셨다.

남편 말로는 요즘 들어 스트레스가 많은 날에는 한 개비씩 담배를 피우신다고 했다. 담배는 끊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참는 거라고 누군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마음이 답답하실 때면 한 개비씩 피우실 수도 있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이 이 말을 했을 때, 아버님이 느끼셨을 허전한 마음이 서울까지 전해지는 것 같아 내 마음도 먹먹해졌다. 우리에게는 이미 너무 많이 이야기하고, 너무 많이 그려봐서 무뎌진 것일 수도 있는데... 아버님은 오늘 밤 온전히 그 충격을 받아내실 생각을 하니 한없이 죄송해졌다.

아빠가 화장실 들어가시면서
담배를 들고 들어가시네.
여보, 우리 꼭 잘 살자.
얼른 돈 벌어서 성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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