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한 뒤, 의도치 않은 이유로 이전 직장과 몇 번 연락을 하게 되었다.
바로 옆자리에서 일하던 동료는 아니었지만 오며 가며 안면이 있는 과장님께 연락이 왔었고, 내가 몇몇 가지 일을 도와주기로 했다. 세세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어떤 이는 굳이 그런 서류를 보내줄 필요도 없는 일이라 하고, 어떤 이는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이전 직장을 탓하기도 했지만 나는 적어도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내가 10년이나 몸담았던 곳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10년이나 근무하고 퇴사한 직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하지만 그건 나만의 짝사랑이었다. 요구에 응해주지 말걸 그랬다. 그랬더라면 상처받지도 않았을 텐데.
익숙한 전화번호로 전화가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만 익숙하지 않은 전화번호로 걸려온 전화는 잘 받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전화번호 국번이 낯익었다. 이전에 근무하던 회사 번호였다.
"여보세요..."
"과장님~ 잘 지내셨지요? 인사팀 ㅇㅇㅇ 과장입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좋은 감정도, 그렇다고 나쁜 감정도 없는... 정말이지 그냥 이전 직장의 아는 사람이었다. 인사 관련 업무를 볼 때, 몇 번 스쳤던 과장님. 오며 가며 눈인사 정도 하는 사이. 사람 많은 강남역 한복판에서 만났더라면 어디서 봤는데... 하면서 기억을 더듬다가 아~! 하고 뒤늦게 떠올릴만한 그저 그런 직장동료 사이였다.
구구절절한 회사 사정 이야기를 하며 이틀 뒤까지 내게 몇 가지 작업을 요청했다. 회사에서 의도한 대로 일이 진행되면 서류도 제출해야 할 것이라며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면서 본인의 부탁이 결코 내게 귀찮지 않은 일이며, 결국 다~ 나를 위한 일이 될 거라는 위로 아닌 위로를 해주었다. 그냥 본인이 곤란해져서 나한테까지 부탁하는 거라고 하지, 어쭙잖은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지만 해주겠다고 했다. 한 때는 같은 회사에 몸담았던 동료였으니까.
이틀 뒤, 작업을 완료한 뒤 문자로 연락을 했다.
"과장님, 말씀하신 작업은 완료했습니다. 확인해 보시고요. 더 필요한 것 있으시면 말씀 주세요."
잘 받았다는 연락도, 앞으로 어떻게 될 거라는 안내도, 간단한 회신도 반응도 없었다.
그렇게 끝이었다. 수요일에 보낸 내 문자는 그렇게 잊혔고, 주말이 지났다.
그다음 주에 다른 회사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회사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설명해 의하면 내가 보낸 작업물은 지난주에는 필요했으나 이번 주부터는 필요 없는 것이 되어 있었고, 인사팀 과장이 원하던 대로 원만히 일이 잘 진행되어 회사에서는 크게 이슈없이 일이 마무리 단계에 있다는 소식. 지난주에는 위기를 모면할 임시방편이 필요했었나 보다. 이젠 내 작업물이 굳이 필요 없어졌나 보다.
마음이 헛헛했다. 연락해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필요에 의해 찾게 되고, 버려지는 것이 회사생활이라고 하지만... 인사팀에 있다는 사람이 저따위로 해서 과연 회사가 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손에 꼽히는 대기업이라는 곳인데 내부 직원 마인드가, 더구나 인사채용담당 직원의 마인드가 저러니 앞으로 좋은 사람을 구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떠나온 회사를 친정 회사라고 한다.
친정 회사가 잘 안 되는 꼴을 보며 어떤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저런 회사에 더 근무하지 않고 적절한 타이밍에 퇴사할 수 있었던 건 천운이었다며 너스레를 떤다. 본인에게 퇴사는 행운이라며.
하지만 막상 퇴사를 하고 나니 친정 회사에 대한 애틋함 또한 그만큼 많이 남는다.
여러 회사를 옮겨 다니지 않고, 한 회사에만 있다가 퇴사를 한 나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겠다. 괜히 친정 회사가 욕을 먹고, 아직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실망스러운 언행을 하면 괜히 내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쉽고 안타깝다. 더 잘 되어서 쭉쭉!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을 텐데... 하는 짠함이 마음속에 자리한다.
누군가는 내게 괜한 오지랖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내게 감성팔이라고 놀려대지만... 정말 마음이 그렇다. 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곳은 아니지만, 10년간 몸담았던 곳이기에 잘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 같은 것.
남편은 또 바스락거릴 내 멘탈 걱정을 하면서 이젠 잊으라고 하지만 내 인생 30년 중에 10년을 함께 했던 곳인데 쉽게 잊힐 리가 있겠는가. 쉽게 잊히고, 쉽게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오히려 더 용한 것이 아닐까. 내 인생의 1/3 가까이를 함께 했던 곳인데.
퇴사 면담을 할 때, 인사팀장님이 내게 말했다.
내가 꼭 우리 회사를
매출 ○○억, 시가총액 ○조에 이르는
멋진 회사로 만들 거거든.
김과장, 나중에 나간 거 후회할 텐데
진짜 나가도 괜찮겠어?
워낙 강경하게 퇴사를 하겠다고 우겨대는 나를 한 번 흔들어 볼 요량으로 말씀하신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저분이라도 저렇게 회사를 아끼고 귀하게 여겨 주시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인사팀장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내 퇴사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고, 결국 또박또박 말대답을 하고야 말았다.
"그럼요. 그런 좋은 회사 만들어 주셔야죠. 저도 나가서 그만큼은 아니어도 멋지고 좋은 회사 차리겠습니다. 나중에 꼭 제가 차린 회사 보여드릴게요. 믿어주시고, 보내주십시오."
문득 인사팀 과장이 하는 일을, 그의 태도와 말투를 인사팀장님은 알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든다.
멋진 회사는 인사팀장님의 의지만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닌데... 직원들은 멋진 회사를 만들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지, 나는 저 회사에 다닐 때 어떤 직원이었는지 되돌아 생각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