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무언가를 배우는 일에 열심이었다. 말 그대로 성실한 아이였다.
엄마가 보내준 피아노 학원과 미술학원도 땡땡이친 적 없었다. 뭐에 홀렸는지 워드 프로세서 자격증을 3급부터 차근차근히 1급까지 모두 땄다. 고등학교 때에는 문학동아리를 했었는데 학교 축제에 꼬박꼬박 시화 액자를 출품했다. 지금 보면 오글거리는 시 구절이지만, 열일곱 나이에는 나름 진지한 작품 활동이었다. 고3 입시를 위해서 튼튼한 체력이 필요하다며 잠깐 검도를 배운 적도 있다. 운동도 쓸데없이 열심히 였다. 경상북도 대회에 나가서 신기하게 상도 타 왔다.
평범한 모범생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이켜 보니 이것저것 해 본 것들이 적지 않다. 남들에 비해 빼어나게 잘 하지는 못하더라도 언제가 한 번 해보았다고 이야기할 줄 아는 아이, 새로운 것을 대할 때 주눅 들지 않는 아이로 키우겠다는 우리 엄마의 교육목표가 얼추 성공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무언가를 배우는 것에 있어, 항상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있어왔던 것은 아닌가 싶다. 자격증 취득, 대회 출전, 작품 출품...
나는 배우는 과정을 즐겼던 것일까.
아니면 게임에서 미션을 완수하듯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그 과정을 견뎌왔던 것일까.
대학을 다닐 때, 취업을 하기 위해 토익을 공부했었다. 영어공부가 필요한 것은 알았지만 그 당시에는 해외근무를 희망하는 것도 아니었고, 외국어가 필요한 직무로 지원할 생각도 없었기에 당장 당락에 필요한 토익점수가 급했다. 매달 점수의 등락에는 마음 졸였지만, 정작 외국어 실력에 대한 아쉬움은 덜했다.
입사 후 대학원을 가려고 한참을 고민했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내게 물었다.
"이직하려고 대학원 가는 거야? 회사 옮길 거 아니면 왜 석사로 업그레이드를 해. 월급도 안 오를 건데."
적지 않은 대학원 학비에, 저녁과 주말 시간을 온전히 쏟아부어야 하는 대학원 준비 앞에서 나는 결국 등을 돌렸다. 그때는 학위 서가 굳이 필요 없을 것 같아서였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쓸데없는 공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더 이상 써먹을 데가 없어서였다.
며칠 전 후배가 문득 이런 이야기를 했다.
시험 준비를 하다가 그만두면
과정이야 어떻든
그냥 떨어진 애가 되는 거잖아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게 싫어요.
후배는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후배의 전공을 가진 아이들이라면 많이들 응시한다는 유명한 자격시험이었다. 합격만 하면 안정적인 미래가 보장되는 시험이었다.
후배는 그 시험에 합격해서 해당 직업을 가지는 것이 간절한 꿈은 아닌 듯했다. 직업에 대한 환상, 탄탄한 미래에 대한 동경. 그런 장밋빛 미래를 그리면서 수험준비를 하고 있진 않았다. 다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쉽게 이 시험을 포기해 버리면 앞으로 다른 것들도 그냥 그렇게 포기해 버릴 것 같아서 시험 준비에 최선을 다해보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듣기에 누구보다 멋진 각오였고, 어느 누구보다 확실한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에 기특함이 뚝뚝 묻어 나왔다.
그런데 그 후배는 본인의 그런 마음가짐을, 겪어온 과정을 사람들이 알겠냐며 말꼬리를 흐렸다. 결국 나중에 시험에 안되게 되면 그냥 떨어진 아이가 될 뿐.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공부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고 그냥 합격한 애와 그렇지 못한 애로 나누어지는 게 속상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무작정 과정을 즐기기보다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는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나도 동의한다. 목표 없는 과정은 자칫 표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다른 목표를 가진 사람도, 그저 과정을 즐기는 사람에게도 따뜻한 눈길을 줄 순 없을까.
꼭 무언가를 위해서만 움직여야 하는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꼭 무언가에 쓰여져야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되돌아 생각해보니 퇴사를 하고 나서도 그런 질문을 숱하게 받아왔던 것 같다.
김 과장, 요즘 뭐해?
뭐 배우러 다니는데?
그다음에는 무슨 일 하려고?
그건 배워서 어디다 쓰는데?
배움이 쌓이고, 경험이 모여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기존에 없는 것을 생각해 낸다.
창조란 그런 것이라고, 창의력이란 바로 그런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라고 수도 없이 이야기해놓고 정작 우리는 뭐에 쓰려고 그걸 배우냐고 묻는다.
꼭 무엇을 따고, 그것을 어디 써먹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마음에 쌓이고, 몸에 기록되면 결국 내 것이 된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된다. 그 시간이 쌓여 다른 사람과는 다른 내가 될 것이다.
그런 감사하고도 소중한 순간들인데 어찌 쓸모없다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