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시간.

by 수련화


회사를 다닐 적, 사람들은 내게 참~ 열심히 산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

김 과장, 참 열심히 살아.
매일 저녁 무슨 약속이 그리 많아?
바쁘게 사니 보기 좋네.


책상 위에 올려진 탁상 달력에는 정말 매일매일 약속들이 들어차 있었다. 저녁은 고사하고, 매일 점심 약속도 꼬박꼬박 채워져 있었는걸. 그때는 아무 약속도 없이 집으로 퇴근해야 하는 날이면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괜히 1시간 정도 늦게 회사에서 나와 느긋하게 지하철 한 정거장을 걷기도 했다. 저녁 약속이 없는 휴일 같은 기분에.

대학교 때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매일매일 지하철을 타고 서울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기숙사에 살았으나 기숙사에서 잘 볼 수 없는 아이였다. 매달 기숙사 식당 식권이 수십 장씩 남았다. 기숙사를 지키는 집돌이 집순이들에게 나누어 주고도 남는 식권은 아침에 우유로 바꿔먹었다.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서 어디론가 사라지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바쁘게 사는 걸 찬양한 적은 없었다.
선천적으로 타고 난 체력이 그리 강하지 못해 늘 입술 언저리가 부르터 있었다. 피곤했던 것이지. 대학교 때에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으나 입사 후, 침대에 누워서 1분은 넘긴 적이 거의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체력에 부치는 생활을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졌고, 항상 아침에는 피곤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일을 하고 저녁에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배우러 다녔다.

그렇게 사는 것이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청춘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마땅히 젊은이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바쁘고 정신없게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도 없는 모임에 참석하고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곤두서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의 20대와 30대 초반은 누구보다 바빴다.


퇴사를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내가 해왔던 모든 것이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 운동을 해도 예전 하던 것의 50~70%만 하게 되었고, 산책도 한 번에 30분 이상 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그나마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콧바람이나 쐴 수 있지, 한창 입덧이 심할 적에는 하루 종일 현관문 앞에도 발을 내밀지 못할 정도였으니. 예전의 내 모습과는 사뭇 다른 1년을 보내왔음이 틀림없다.

처음에는 내 생활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뒤쳐지고 도태되는 느낌. 뭔가 잃어버린 느낌은 곧 내게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이러다 일에 대한 열정 또한 시들해져서 그냥 현관문 안에서 머물러 버릴까 두려웠다. 다시 일을 구할 수 없을지에 대한 두려움 이전에 그냥 이렇게 집순이가 되어버릴 것 같은 불안함이 있었다. 왠지 그럴 것만 같았다.

냉장고에 떨어진 양파며 감자 사러 갈 때가 되었네~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 때마다, 점점 늘어가는 요리실력을 느낄 때마다, 그렇게 귀찮아하던 빨래 개기가 일상이 되어버린 느낌이 들 때마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회사 다닌다고, 맞벌이한다고, 주말 부부라고 등한시 해왔던 일들을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한 것에 불과했는데. 나는 그때 괜히 내가 입지 말아야 할 옷을 꺼내 입은 양 어색해했다.

아직 어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어렸던 것 같다.
회사를 10년을 다니고, 뱃속에 아이를 품은 예비엄마였으나... 아직 한참 어렸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 예쁜 하이힐을 신고, 빌딩 숲을 헤쳐 출근을 하며, 임원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PT를 하는 모습만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야 채워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해서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하루 뒤쳐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마 전, 블로그의 글을 보고 한 이웃님이 댓글을 달아주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도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아무 데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니깐요."

그냥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시간.


나이의 많고 적음, 사회경험의 많고 적음을 떠나 마음의 울림을 주는 말이었다.
분명 많은 시행착오와 혼자 만의 고민을 겪은 뒤, 저런 생각을 얻게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이제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꼭 무언가를 해야 시간이 채워지는 것은 아님을.

시간이 흐른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채워지고, 배워가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굳이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배워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겪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배웠다. 그냥 내버려둔다는 것이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아침에 항상 남편이 전화해서 오늘은 무슨 일이 없냐, 어디를 가냐고 묻는데... 한 때는 그것도 스트레스 일 때가 있었다. 하루 종일 할 일도 없는데 자꾸 물어대냐며 한 소리를 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요즘엔 여유롭게 받아치곤 한다.

응. 밥 먹고 운동 갔다가
오후엔 별일 없어.
꼼질이랑 책 보면서 쉬려고.


의도였든, 그렇지 않았든지 간에 그냥 내버려두었던 내 1년으로 인해 글쓰기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좋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온라인 상의 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 두 명으로 조촐하던 우리 가족이 세 명으로 늘었고, 옹알이를 해댈 귀여운 녀석을 곧 만나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었으나, 무엇보다 내 인생의 큰 의미를 가져다 준 시간을 지나오면서 조금은 긴 호흡으로 시간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라는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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