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면서 우리의 책장을 이제야 결혼시켰다.
결혼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내내 주말부부를 해왔던 터라 우리에게 이제야 첫 신혼집이 생겼다. 남편은 퇴사하기 전까지 회사 기숙사에 살았고, 나는 서울에서 엄마와 함께 생활했다. 남편이 주말에 올라오면 내 방에서 함께 지냈으니, 엄밀히 말해 우리의 신혼집은 없었던 셈이다. 신혼방 정도랄까.
신혼집이 없으니 책장을 합칠 일도 없었다.
남편이 보던 책은 회사 기숙사에 있었고, 내가 보던 책은 우리의 신혼방에 그대로 꽂혀있었다. 서로에게 책을 추천하는 것을 즐겼지만 각자 어떤 책을 가지고 있는지 속속들이 살펴볼 기회는 없었다.
이삿짐을 정리하는데 책이 한가득이었다.
커다란 책장을 가득 채우고도 바닥에 널브러진 책들이 꽤 있었다. 평소 짐을 늘리지 않겠다며 도서관에서 빌려다 본 책이 그렇게나 많은데 대체 저 책들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남편과 나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다 조용히 책장이 들어있는 방의 문을 닫아 버렸다.
"천천히 정리하지 뭐, 우리만 사는 집이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아요.
여보는 옛날 자료들이 참 많더라.
난 다 버렸던 것들인데
여보는 다 가지고 있더라.
이사가 끝나고 며칠 뒤.
갓난쟁이 육아에 멘탈이 나가 있는 나를 대신해 남편이 책장정리를 자처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책을 모두 모아 분류별로 정리해 꽂아보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 하고 싶은 자의 열정을 막지 말라고 했던가, 나는 조용히 미소로 응원했다. 어떻게든 정리가 될 테니 한시름 놓았다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 건 안 비밀.
책을 정리하면서 남편은 그 속에 숨어있는 재미들을 찾아내었다.
나만 가지고 있는 책들, 남편만 가지고 있는 책들, 둘 다 가지고 있었던 책들, 어떤 분류의 책이 가장 많은지. 수백 권이 넘는 책 속에서 남편은 하루 종일 길을 잃은 듯, 길을 찾은 듯... 정리에 열을 올렸다. 소소한 추억팔이도 있었다. 내 대학생 때 사진들을 들춰보며 이게 누구냐며 놀리기도 하고, 회사 다닐 적 자료들을 보며 예전 기억을 더듬기도 했다.
남편과 나는 같은 회사에 다녔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같은 그룹사라고 해야겠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간 동안 근무를 했으니 비슷한 경험들도 많을 텐데... 남편과 나의 짐은 내가 보기에도 확연히 달랐다. 나는 신입사원 때 받은 자료들, 교육에 사용했던 교재들, 소소한 제작물들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기껏 추려서 중요한 것들만 남긴다고 정리한 것인데도 책장 한편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반대로 남편의 짐은 단행본이 전부였다. 회사 짐은 하나도 없었다.
행사 때 나눠주었던 명찰도 내겐 소중한 물건이었다. 내 이름이 적힌 명찰을 함부로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교육을 운영하면서 만들어서 나눠주었던 작은 소책자도 내겐 소중했다. 저 소책자를 만들기 위해 내가 새벽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어느 것 하나 내게 허투루 버릴만한 것들이 없었다.
하지만 남편에게도 그런 추억이 없었겠는가. 남편에게 그런 소중한 기억이 없었겠는가.
그런 것들을 모조리 버리고 올라온 남편이 매정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미니멀 라이프는 매정해야 가능한 건가.
다음 날, 남편이 정리하고 간 책장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제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 것일까.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항상 회사에서의 기억이 발목을 잡았다. 예전에 했던 프로젝트들, 내가 회사에서 받았던 평가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이전 직장에서의 업무와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 꼬리표를 떼어내지 못했다. 완벽이라는 이름 아래 자꾸 예전 기억을 더듬었다. 그게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가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반면 남편은 당당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당당해 보였다.
어디에 가든 퇴사하고 쉬고 있다고 거리낌 없이 말했고, 새로운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도 주저함이 없었다. 가장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간절함의 강도가 다르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나는 알아차릴 수 있었다. 퇴사를 하는 동시에 남편에게는 다른 스위치가 켜진 것만 같았다. 남편은 새로운 일은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에게 대기업에 다녔던 어제는 잠시나마 잊힌 듯 보였다.
나는 일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맘 편안히 하는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직업이 무엇이냐는 말에 거리낌 없이 주부라고 대답하는데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왠지 그 일이 내게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내 책장 가득히 쌓여있는 회사에서의 기억들 만큼이나 내 마음속에 남아있는 앙금이 많았다. 어떨 때는 아쉬움이었고, 어떨 때는 잔잔한 추억이었으며, 어떨 때는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으리라.
누군가는 과거를 발판으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것이다.
또 많은 이들은 과거의 경험 위에 새로운 도전을 쌓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어제의 것을 조금 걷어내야 비로소 내일이 보일 때도 있다.
과거의 내 경험들이 나중에 내게 도움이 되는 날이 온다 할지라도, 새로운 것을 그리고 준비하는 어느 시점까지는 마치 지금이 처음인 것처럼 대해야 할 때도 있다.
나의 오늘은,
어제의 기억 속에 살고 있는가.
어제를 추억하며 내일을 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