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힘들어 죽겠어.
불평불만 않고 시키는 거 다 했더니
누굴 호구로 아나.
진짜 나 퇴사할까 봐.
오랜만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길, 전화기 너머로 그녀의 무거운 발걸음이 느껴졌다. 해결책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투정 부리고 싶었던 거다. 흔한 상사의 흉보기나 후배 탓하기는 없었다. 그저 '회사' 이야기만 했다. 답답한 자기 처지만을 탓했다.
참 순하게 회사생활을 하는 친구였다.
대들고 토다는 것이 다반사였던 나에 비해, 친구는 늘 고개를 끄덕였고 탐탁지 않았으나 회사의 지시에 따랐다. 잦은 T/F 호출에 귀찮기도 했지만, 내심 내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에 어깨를 으쓱이던 게 나였다면 친구는 아니었다. 아무도 본인을 찾아주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고, 본인의 칼퇴근이 보장되는 조용한 회사생활을 원했다. 회사를 가늘고 길게 다니고 싶다는 말이 진심인 친구였다.
그 친구의 입에 요새 들어 부쩍 퇴사가 오르내린다. 힘든 야근에, 주말 출근까지. 그마저도 일이 진행되는 모양새도 아니고, 의미 없는 회의와 임원 비위 맞추기만 반복되다 보니 퇴사하고 싶다, 퇴사해 버릴까 보다 하는 푸념을 달고 산다.
자기 출세에 눈이 먼 상사는 이래서 별로고, 배려 없는 동료는 저래서 힘들다. 요새 후배들은 예전이랑 달라서 그렇게 눈치가 보인다. 밑에서 치이고, 위에서 밀리다 보면 하루 종일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가 퇴근길, 사무실 철문 손잡이에 손을 대고서야 긴 숨이 몸속을 빠져나온단다.
내가 전화기 너머로 퉁명스레 날을 새웠다. 그녀의 진심을 알기에 가능한 말이었다.
"그래서 진짜 그만둘 거야? 못 그만두잖아!"
"아니, 진짜 그만둘까 싶은 생각이 든다는 거지. 못 그만 두지. 여기 뼈를 묻어야지."
"그렇지? 못 그만 두지? 그러니까 그냥 그러려니 해. 어쩌겠어. 신경 써봤자 우리 몸만 상한다니까."
"그렇지. 못 그만 두지. 집도 사야 하고, 돈도 모아야 하는데... 그리고 내가 지금 어딜 가겠냐? 누가 받아 주기나 한대?!"
"술이나 한잔 해. 요 뒷골목에 이자카야 하나 생겼는데 분위기 괜찮더라."
"진짜? 나 그럼 사케 사케! 이번 주 금요일 어때?"
어쩌면 그녀의 투정은 '퇴사'라는 말 한마디와 사케 한잔이면 달래질 것이었나 보다.
매일같이 퇴사를 입에 올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걱정을 한 날이 있었다. 저 많은 사람들이 퇴사를 하고 직장을 옮기면, 누가 회사에 남아서 일을 하지. 갑작스러운 업무 공백이 쉽게 메워질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리숙 하기가 세계 최강급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이 퇴사를 안주거리로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어쩌면 더 오래 회사를 다니고 싶다는 작은 열망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나 진짜 퇴사할까, 까짓 퇴사해버려! 사람 귀한 줄을 알아야지!"
"그래그래! 한 잔 마시고 잊어버리자! 진짜 나가버릴까 보다!"
술잔을 기울인 두 사람은 내일도 만원 지하철에 헐레벌떡 몸을 싣고 출근길에 오를 것이다. 어제보다 더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못다 한 회의 준비에 열을 올릴 것이다. 한차례 중요한 일들이 들불처럼 지나고 나면, 따뜻한 커피 한잔을 나누며 잠시 몸을 녹이겠지. 진짜 이젠 퇴사를 해야 할 타이밍이라며 동료와 이야기 나누면서 말이다.
퇴사는 어쩌면, 회사생활을 며칠 더 연장하기 위한 직장인 전용 위로의 언어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