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하고나서 남편에게 글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선언이라고 하기에는 좀 거창하고, 나름의 다짐을 전했다. 그렇게라도 이야기 해놓지 않으면 뿌리가 약한 내 다짐이 흐지부지 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회사를 10년이나 다녔지만, 특별한 기술이랄 것이 없었다. 엑셀 조금, 파워포인트 조금. 사내 정치꾼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법은 어깨 너머로 배워나왔으나 막상 회사를 나오고 나니 그 것도 쓰일 곳이 없었다. 그나마 회사 다니면서 익힌 몇몇 가지 잔기술들은 대기업이라는 인프라 안에서만 쓰임이 있는 것이라 막상 바깥 세상에서 혼자 무언가를 하려고 하니 제약이 많았다.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 위로는 보고하고 아래로는 쪼아대는 전형적인 대기업 관리자로 성장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마 대학교 때부터 틈틈이 책을 읽고 메모를 하던 습관이 있었다. 회사보고서에는 감성팔이가 금물이라 설추석 안부메일을 쓸 때만 슬쩍슬쩍 꺼내 사용하던 잔기술이 드디어 쓸모를 찾았다. 몇 자 써내리는데는 다행히 힘들지 않았기에 글을 쓰기로 했다. 거창하게 뭘 하겠다기보다 당시의 느낌을 기록해 두고 싶었다. 쓰임은 후에 생각하기로 하자.
연애의 감정을 가장 솔직하게, 그리고 가장 생생하게 전할 수 있을 때는 막 연애를 시작했을 때다. 혹은 갓 연애를 끝낸 경우에도. 그 때에 쓰는 글에는 펄떡이는 감정의 기복이 그대로 글에 묻어난다. 글을 잘 쓰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글의 생동감이라는 것은 타이밍에서 온다고 믿는다. 수려한 글 솜씨 이전에 절절한 감정의 깊이가 필요하다.
퇴사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시간이 가기 전에, 더 잊혀지기 전에 기록해 두어야 했다. 훗날 젊은 날의 기록이라고 기억되겠지. 설레는 마음으로 얼른 노트북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퇴사와 관련된 많은 생각들이 머릿 속에 들어찼다.
지독히도 싫어했던 상사, 주는 것 없이 미웠던 사람, 유난히도 힘들었던 프로젝트, 어이없던 회사의 의사결정들. 글로 남기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아니 글로 굳이 남기겠다기 보다 나의 퇴사를 정당화 시켜줄 수많은 아이템들이 떠올랐다. 어느 것을 갖다 대어도 위로받기에 마땅했다.
"참 힘들었겠다. 그동안 잘 참았구나. 나오길 잘한거야. 너의 결정을 응원해."
이렇게 부당하고 부조리한 회사를 어떻게 다녔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남기겠다고 했던 기록은 점점 날카로워지고 뾰족해졌다. 노트북 위를 날뛰는 내 손가락에는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글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10년 동안 몸 담았던 회사가 이 정도로 바닥은 아니었는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일부는 표현을 다듬었고, 일부는 부러 좋은 면을 찾아보려 노력했다. 그것도 내가 지나온 곳에 대한 예의라고 맹목적인 비판도 삼갔다.
그렇게 한참을 써내려 가던 어느 날, 번개가 스치듯 번쩍하고 눈이 떠졌다.
나는 나 스스로 결정한 퇴사를 이야기 하고 있었는데, 정작 그 속에 나는 없었다. 내 생각은 증발하고 없었다. 내가 느꼈던 허탈함, 옳지 못하다 생각하는 일을 해야했던 무력감, 퇴사 전날까지도 야근을 하던 간절함. 누가 나에게 퇴사를 하라고 떠다밀지 않았다. 남들이 다 말리던 퇴사를 강행하고 오늘을 살고 있는 건 나인데, 내 글 속에 나는 없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사건들만이 내 글 속에 펼쳐져 있었다. 내가 신랄하게 비판하는 모든 것들이 과거의 내 기억 속에서만 살고 있는 것들이었다.
내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서 시작한 글쓰기였다. 젊은 날의 기록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의지를 불태웠던 나다. 그런데 그 글 속에 나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을 꺼려했는지도 모르겠다. 내 머리 속, 좋지 못했던 기억 속에 나를 끼워 넣는 것이 불편했던 거다. 그 속에 나는 없었다고, 나는 그저 그 먹먹함을 지켜보고 있었던 제 3자였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내 이야기를 써내려 가면 될 것을,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퇴사를 한 지금도 그 것이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내 마음 속에는 아직 나라는 한 사람에 대한 이미지보다 열성으로 회사를 다니던 김과장의 이미지가 더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회사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편하기보다 그 당시의 내 감정들에 대해 들춰내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 때 너는 무엇을 했었느냐, 왜 너는 더 행동하지 않았느냐. 아직도 내 감정들은 회사의 그늘막 어딘가를 헤매이고 있었다.
10년이라는 허물을 벗어내는 것이 이리도 힘들다.
내 몸에 들러붙어 이젠 허물인지 나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로 한 몸이 된 것을 억지로 떼어내려니 쉬울리가. 회사라는 것을 분리해서 생각하기에는 이미 내 몸에 너무나 찰싹 붙어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지금, 이제야 조금씩 내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건 퇴사이야기가 아닌데..."
아직도 한 번씩 글을 써내려가다가 멈칫거리긴 하지만 예전보다 내 감정들에 솔직해지게 되었다.
퇴사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 그 날들이 모두 나이고, 그렇게 익어간다.
이제 비로소 온전한 내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