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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화 Feb 05. 2018

D-26 모든 준비의 시작은 손수건이지

조리원 커뮤니티

 출산이 꼬박 한 달 남았다.
 아니 산부인과 의사선생님이 정해준 출산일이 앞으로 꼬박 한 달 남았다. 어떤 사람은 출산 예정일 한 달 전, 내진을 처음 하러 간 날에 진통이 시작되어 아이를 낳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예정일이 한참 지났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어 유도 분만을 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는 언제쯤 태어날까?
 다른 건 몰라도 엄마 아빠가 함께 있을 때 태어났으면 좋겠는데. 혹여 아빠가 지방에 있는 날이거나 어디 먼 곳에 가 있다가 돌아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날이라 우리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 지켜보지 못하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 그래, 근처에 사시는 외할머니도 금방 오실 수 있는 날이었으면 좋으련만. 날은 맑고 햇볕이 좋았으면 좋겠고, 밤보다는 낮이었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 모든 것이 그저 욕심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아이가 태어나는데 바깥 상황 고려하고, 엄마 아빠 컨디션 고려해서 나올 리가 만무하다.

그래. 건강하게만 태어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어.


 혹시 녀석이 일찍 나올 수도 있으니 출산 가방을 미리 싸야겠다.
 산전 요가교실 선생님이 신신당부했던 그 출산 가방이다. 간혹 미리 출산 가방을 싸지 못했는데 갑작스레 출산을 하게 된 산모들의 경우, 출산 후 필요한 것들을 남편에게 부탁하게 된다고 한다. 그럼 남편이 와이프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필요한 것들을 집에 가서 챙겨오게 되는데...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출산 후 따뜻한 옷을 입고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해야 해서 남편에게 부탁했더니, 몇 년 동안 입지도 않던 이상하고 후줄근한 옷을 옷장 깊숙이에서 꺼내온다는 것이다. ㅡ,.ㅡ;;;
 특히나 여름에 아이를 낳은 산모들은 짧은 옷들이 손쉬운데 나와있으니 더하다고... 물론 굳이 여름이 아니어도 남편들의 황당한 일처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옷장 열면 바로 보이는 그 흰색 셔츠를 가져와 달라고 분명 말했는데, 장롱을 열어 쓰지도 않던 서랍을 뒤져 그 속에 박혀있는 아이보리 셔츠를 가져오는 상황이랄까. 마치 셔츠를 채굴하듯이.... ㅠㅠ 이래서 집 청소는 그때그때 싹싹! 버리면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름 아가랑 처음 하는 외출이잖아요. 조리원 가는 길. 그때 이상한 옷 입고 가기 싫으시면 미리 싸두세요. 제가 이렇게 말해도 꼭 나가는 날, '선생님 저희 남편이 그 남편이었어요!' 하시는 분들 있다니까요. ㅎㅎ"
 
 조산사님의 마음이 담긴 현실 조언.
 여하튼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나는 출산 가방을 미리 싸기로 했다. 현관문 앞에 고이 모셔놓고 혹시나 내가 출산 가방을 챙겨가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우아하게 말해야지.
 "여보. 현관문 앞에 있는 가방 있어요. 그거 병원으로 가져다주세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출산 가방을 챙기는데 분명 임신 기간 동안 이것저것 많이 준비해 둔 것 같은데 막상 가방에 담을 만한 게 없다. 인터넷 블로그를 보면 큼지막한 캐리어에 가득가득 많이들 싸가던데, 난 막상 가방에 담을 만한 것이 없다. 또 잘 몰라서 준비물품들을 한참 빼먹은 것일까. 갑자기 불안이 엄습해온다.

 우선 내가 사용할 것들.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가지들, 속옷이랑 산모패드, 수유패드.(물론 산모패드는 병원이랑 조리원에서도 준다고 해서 많이 챙기질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냥 일반 생리대를 사용하는 게 훨씬 좋았다는 사실) 조리원에서 신생아들에게 필요한 것들은 다 챙겨주니까 기저귀나 옷가지들도 챙길 필요가 없고, 빨래도 안 할 테니 유아 세제 등도 필요 없고, 로션도 거기서 발라줄 테고... 장난감?! 뭔 소리야. 눈도 못 뜰 텐데 이것도 빼고...
 결국 내가 챙겨야 하는 건 손수건뿐. 아쉬운 마음에 사은품으로 받았던 작은 아기 물티슈도 하나 넣었다. 왠지 이거라도 넣어야 출산 가방일 것 같아서.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결국 손수건뿐이구나.

 출산 준비를 시작하면서 인터넷에 떠다니는 출산준비 리스트를 받아보았는데 A4 3장 분량이라 출력만 해두고 계속 주변을 서성였던 기억이 난다. 들춰보면 왠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만삭이 되어 어쩔 수 없이 그 리스트를 하나하나 챙겨보았는데, 많기도 하거니와 어려운 말들에 그냥 덮어 두었다. 속싸개? 겉싸개? 접착 면봉? 아기가 조금 크면 필요하다는 슬링? 아기 띠? 힙시트?
 결국 꼭 필요하다는 카시트만 사서 차에 달아놓고 손가락을 조물 거렸다. 병원이랑 조리원에서 초기 준비물은 준다고 했으니 천천히 알아가보면 되겠지.
 간단한 세면도구 정도만 챙겨오라는 조산사 선생님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자, 그럼. 손수건만 준비하면 되니까 정성을 다해 손수건을 싸보자.
 여기저기서 받아둔 손수건에 아이한테 좋다고 사둔 밤부 손수건까지 손빨래로 조물조물해서 쨍한 햇볕에 내다 널었다. 사실 오늘 출산 가방을 싸기로 정한 이유도 빨래가 한몫을 했다. 쨍한 햇볕에 손수건을 말리고 싶은 마음에 며칠 전부터 날을 벼르다 오늘을 찜 한 것이다.

 아기 손수건은 세탁기에 돌리면 안 되는지 한참을 검색해 보다가 첫 빨래인 만큼 내 손으로 빨아줘야지라고 생각했다.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빨래를 담그는데, 배가 물컹. 이미 잔뜩 볼록해진 배가 세면대에도 부딪히고 내 가슴팍에도 닿았다.
 "아가야. 엄마가 지금 우리 아가가 쓸 손수건 빠는 거예요. 곧 만나요~"
 샘플로 받아둔 '친환경 유아 세제'로 조물조물. 여기저기서 사은품으로 손수건이 같이 들어올 때 차곡차곡 모아뒀더니 어느새 수십 장이다. 얼마나 필요할지 모르니까 우선 다 빨아보자.                                      

 손수건을 다 펴서 널었더니 빨래 건조대가 부족하다. 또 인터넷 폭풍 검색. 누군가는 반을 접어서 말린다던데... 괜히 찝찝한 마음에 두 번에 나눠서 널어 말리기로 한다.

 어쨌든 빨래 끝~!
 아. 이제 진짜 엄마가 되는 건가. 마음이 싱숭생숭, 괜히 눈가가 촉촉해진다. 얼마 뒤면 귀여운 아기가 태어나서 이 손수건으로 입을 닦고, 엉덩이도 닦겠지. 이 손수건을 목에다 메고 엄마를 바라보면 방긋하고 웃어주겠지.

 반짝거리던 햇볕이 넘어가고 저녁이 왔다. 퇴근한 남편이 내게 물었다.
 "이제 정말 한 달도 안 남았네. 출산 가방 싼다더니 다 쌌어? 어렵진 않았고?"
 "응! 다 쌌지. 똑띠처럼 잘 싸뒀지. 현관 앞에 내둘 테니까 혹시 아기 태어나면 저 가방 들고 와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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