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500일, 남편의 퇴사를 대하는 아내의 마음가짐

우린 아직 젊으니까! 믿으니까!

by 수련화

지난 10월, 10년 다닌 회사를 그만뒀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지독한 상사도 없었고, 미친 듯이 몰아치는 야근도 없었지만 회사의 앞뒤 없는 관행과 답답한 미래가 내 숨을 조여왔다. 그래서 단 하루도 더 다닐 수가 없었다.

배부른 소리.
사람들은 내게 미쳤다고 했다.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가 아니면 회사에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고, 새로 시작할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살짝 강행하는 것에 무게를 두기로 했다.

남편은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내 고민에 대해 함께 걱정해주고, 나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주었다.
다들 미쳤다고 하는 의견에 오히려 손뼉 쳐 주었다.
대기업을 10년이나 다녀놓고 이제 와서 뭐가 그리 답답해서 나오냐는 우리 엄마의 걱정 섞인 한숨은 당연했다. 하지만 오히려 엄마를 설득해 준건 남편이었다.

어머니가 키워주신 귀한 딸.
어디 가서 1인분 못할 사람 아닙니다. 2인분 하고도 남죠.
믿어주세요! 전 제 와이프 믿습니다!


결혼해서 같이 살 사람이 괜찮다는데, 엄마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오히려 내 딸을 그리 귀하게 봐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하시며 엄마도 결국 나의 퇴사를 허락했다.
대기업 다니던 자랑스러운 딸은 그렇게 자유부인이 되었다.

내가 퇴사를 강행하던 그즈음이었던 것 같다.
남편의 고민도 시작되었다.

하기야 비슷한 대기업이란 곳에서 만나 시작된 인연이었고, 내가 10년이라는 세월을 회사에서 보낼 동안 남편 또한 1년 모자란 9년을 그곳에 있었으니 미래에 대한 답답함이야 얼마나 차이가 있었을까.
남편의 고민도 점점 깊어져만 갔다. 나는 그 고민의 깊이에 대해,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의 고민을 말릴 수는 없었다.

우리가 함께 맞이하는 두 번째 봄이 막 찾아오려고 할 때쯤, 남편이 입을 열었다.

여보. 나 이 회사에서 임원 될 자신 있거든.
그런데 임원이 된들 뭐가 달라지지?
과연 우리가 행복할까?


6개월 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나와 같은 막막함을 느꼈을 남편에게 난 차마 반기를 들 수 없었다. 너무나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 사람의 고민을 존중했기 때문에.

남편은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겁이 나지. 잘 해낼 자신은 있지만 겁이 나는 건 다른 문제지.
대기업에 다니다가 차디찬 바깥세상으로 처음으로 나가는 게 왜 두렵지 않겠어.
하지만 이 곳에 있어서는 더는 희망이 없다고 믿어. 점점 더 그게 느껴지고.
내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시장에 가서 한 번 열심히 살아보고 싶어. 도전해 보고 싶어.
지금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우리의 아이가 태어난다면, 가장으로서 그 조차도 도전하기 힘들 것 같아서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한번 도전해 보고 싶어.

만약 여보가 많이 불안하고 걱정된다면, 그냥 회사에 다닐 수도 있어.
그럼 여보도 나 알잖아. 다 잊고 누구보다 열심히 다닐 거야."

문득 내가 이 남자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수 있을 만큼의 멋진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내가 받은 기회를 이 남자에게도 똑같이 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은 가장이니까 안돼!
당장 가을에 태어날 아이는 걱정도 안 돼?


차마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도 나처럼 꿈 많고 하고 싶은 거 많던 사람이었을 텐데.

물론 나라고 걱정이 하나도 안 되는 건 아니다. 걱정이 안 된다면 순 거짓말.
하지만 내가 선택한 우리 남편을 믿어주고 싶었다. 응원해 주고 싶었다.
30대 중반의 패기 넘치고 자신감 충만한 그 남자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다. 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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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결혼한 지 500일째 되는 날.
우리의 첫 아이가 우리에게 오기 120일 전.
남편은 회사에 퇴사 선언을 했고, 아직까지 우리 부부는 새로운 시작을 위한 설렘에 가득 차 있다.

믿어보자! 한번 해보는 거지!
아직 우린 젊다고 믿어보는 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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