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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화 May 26. 2018

엄마의 오늘 하루는 어땠나요?

조리원 커뮤니티

오늘 늦잠 주무신 거죠?
쓰레기통이 밖에 나와있더라고요.


 새벽에 유축을 하느라 잠을 설쳤더니 늦잠을 자고 말았다. 결국 아침식사 시간을 놓쳐 식사도 거르게 되었다. 방에 있는 것들로 간단히 요기는 했으나 아침에 수유를 하고 나니 참을 수 없이 허기가 졌다. 점심시간이 되기 전부터 식당에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는 엄마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침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쓰레기통이 방 앞에 나와있어서 깨워줄까 하다가 곤히 자고 있을까봐 말았다고.


 처음에는 내가 늦잠 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생각에 움찔했다. 너무 배고픈 표정으로 앉아있었나. 방금 일어난 사람처럼 부스스해 보이나. 특유의 소심한 성격 탓인지 그 짧은 순간에도 별의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내 의문은 해소되었다. 내 방 앞에 놓여 있었던 쓰레기통이 범인이었다.


 "이 방에 사는 산모가 지금 늦잠을 자고 있어요!!"

 굳이 감출 것 까지야 없었지만, 동네방네 알리고 싶지는 않았던 내 소식을 그 녀석이 퍼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배정받은 방은 식당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니 아침 먹으러 나왔던 산모들이 모두 보았겠지. 실제로 가까이 지내는 엄마들이 아침밥을 먹으면서 내 걱정을 해주었다고 했다.

 "새벽에 유축하고, 아침에 수유까지 하는데... 식사 거르면 정말 배고플 텐데. 깨워줘야 할까요 그냥 둘까요."


 내가 지내는 조리원에는 각 방의 쓰레기통을 청소하시는 분이 비워주신다. 거동이 힘든 산모들을 위한 조리원의 배려였다. 하루 동안의 쓰레기를 모아 잠자기 전에 쓰레기통을 방문 앞에 내어놓으면 새벽에 통을 비워주시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방문 앞에 쓰레기를 내어놓는 것이 그렇게 어색할 수 없었는데 막상 며칠 해보고 나니 또 이렇게 세상 편한 것이 없었다.


 잠들기 전, 하루의 마무리는 쓰레기통을 내어놓는 것으로 했다. 남편은 내게 잘 자라며 인사를 하면서 방 안에 있는 큰 쓰레기통과 화장실에 있는 작은 쓰레기통을 문 앞에 나란히 내어놓았다. 불이 꺼진 조용한 복도에는 각 방에서 나온 쓰레기통이 마치 사열을 하듯 총총히 놓여있었다. 조리원에 밤이 내려앉는 시간이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는 방은 쓰레기통도 일찌감치 나와있고, 늦게까지 부부의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새어 나오는 방은 쓰레기통도 늦게 나오기 일쑤였다. 새벽녘에 유축한 것을 내어놓으며 복도를 걷노라면 각 방에서 나온 쓰레기통들이 마치 가로등처럼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나름 새벽에 깨어있는 사람만 볼 수 있는 조리원의 진풍경이었다.


 각 방에서 나온 쓰레기통을 보고 있노라면 그 방 산모의 하루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물론 조각난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그녀들의 하루를 엿보는 것이 제법 재미있기도 했다.

 사실은 유축한 모유를 들고 어두컴컴한 복도를 걸어 거실로 나갔다 오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시작한 장난 같은 것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금방이라도 뒤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새벽에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유축한 모유를 아침까지 방에 둘 수는 없었기에 용기를 내어 복도로 발을 내밀었다. 얼른 신생아실에 모유를 줄 생각에 종종걸음을 쳤다. 그나마 신생아실로 가는 길은 젖병을 들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돌아오는 길엔 무서움이 배가 되었다. 무섭다고 그 새벽에 복도를 뛰어올 수는 없는 노릇. 팔짝팔짝 뛰어올만한 몸 상태도 아니었다.


 궁여지책으로 각 방 앞에 놓인 쓰레기통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면 좀 덜 무서울 것 같아서였다. 쓰레기통을 차례로 보다 보니 금세 내 방문 앞에 와있었다. 그렇게 나의 특이한 새벽 취미가 시작되었다.


 '이 방은 오늘 과일 선물을 받으셨나 보네. 포도랑 배랑 한 박스씩 받으셨구나. 언제 다 드시지?'

 '출산선물 받으셨나 보구나. 내가 저번에 받았던 아기 내복 포장이군.'

 '이 방은 오늘 빵 사다 드셨네. 하긴 나도 빵이 너무 먹고 싶긴 하네. 내일 오빠한테 조금 사다 달랠까.'


 그녀들이 남긴 것에는 그녀들의 하루가 녹아있었다.

 물론 내 쓰레기통에도 나의 하루가 고스란히 담겼다. 소리 죽여 펑펑 눈물을 흘렸던 어느 날엔 믿기지 않을 만큼 눈물 젖은 휴지가 가득했고, 작은 군것질이라도 하는 날엔 어김없이 흔적이 남았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았지만 화장실에서 나오는 쓰레기통에도 나의 흔적이 가득했다. 하루 종일 펑펑 흘러내린 피로 흥건했던 산모패드가 날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작은 쓰레기통은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 깨끗하게 비워진 쓰레기통을 방안으로 들일 때면 비로소 오늘 하루가 시작되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내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비운 채로 시작하고, 채운 것은 버리는 것. 쓰레기통을 비우는 사소한 일이 내게 괜한 울림을 주었다.


 "조리원에서 과자 사다 먹는 남편은 여보밖에 없을 거야. 맨날 우리 쓰레기통엔 과자봉지야."

 우리 방 쓰레기통에 버려진 과자봉지를 애써 밑으로 숨겨 넣으며 내가 장난 섞인 투정을 했다. 다른 산모들이 우리 방 쓰레기통을 보면 이 방 산모는 맨날 저녁마다 과자 사 먹는다고 생각할까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아냐. 내가 봤는데 앞 방도 과자 먹던데?"

 "여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쓰레기통에 과자봉지 있더라고. 내가 딱 봤지. 다 비슷하지 뭐."


 괜히 쓰레기통 하나에 너무 예민한가 싶다가도 무료한 조리원 생활에 작은 활력인가 싶어 웃어넘긴다.

 "오늘 다른 산모들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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