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와 의대신화

AI 시대 의사는 필요한가?

by 우주사슴


의대는 언제부터 ‘성공의 보증서’가 되었는가?


한국 사회에서 의대는 단순한 진학 대상이 아니라 가장 확실한 상향 이동 경로, 곧 ‘사회적 성공의 보증서’로 기능해왔다. 이 현상은 개인의 선택이기 이전에, 구조화된 사회경제적 불안과 문화적 신화가 교차한 결과다.


특히 IMF 외환위기(1997), 글로벌 금융위기(2008) 이후 비정규직 확대, 청년 실업, 자영업 몰락 등이 심화되면서, 소득·직업 안정성에 대한 강박적 욕망이 중산층 이상 가정의 교육 전략을 근본적으로 재편했다. 의대는 이 불안정한 시대 속에서 희소성과 폐쇄성, 직업적 확실성을 고루 갖춘 선택지로 부상했다.


여기에 부모 세대의 문화적 경험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산업화 이후 급속한 사회 계층 이동을 경험한 세대는 사법·의학·고시에 대한 신뢰와 집착을 내면화했다. ‘의사는 어디서든 통한다’, ‘죽을 때까지 직장 걱정 안 해도 된다’는 통속적 서사는, 실제로 공공성과 사적 안정성을 동시에 확보한 몇 안 되는 직업군으로서의 의사를 매혹적으로 부각시켰다.


이 과정에서 입시 제도의 정량화는 의대의 문턱을 ‘능력주의’의 측정기로 기능하게 만들었고, ‘의대 합격 = 수재 인증’이라는 사회적 서열의 의례로 고착되었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정작 “그들은 과연 좋은 의사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AI 시대, 의사는 대체될까? – 아니다. 오히려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의료 현장에서 AI 기술은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영상 판독, 병리학 분석, 진단 알고리즘, 예후 예측 등에서 AI는 점점 더 정확하고 빠르며 객관적이다. 이에 따라 'AI가 의사를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도 일부 제기된다.


그러나 이는 의사의 본질적 역할을 오해한 결과다. AI는 대규모 데이터를 분석하고 진단 가능성을 제시하는 데는 뛰어나지만, 의료가 본질적으로 관계와 윤리에 뿌리내린 돌봄의 행위임을 간과한다. 실제로 환자가 원하는 것은 ‘진단’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진단의 의미와 감정적 무게를 함께 나눌 수 있는 해석자이자 동반자다.


AI는 ‘무엇이 문제인가’를 말할 수는 있어도, ‘그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조언과 동행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의료는 점점 더 기술의 문제가 아닌, 해석과 관계, 감정의 설계 문제로 이동한다.


이 변화는 의사의 실질적 직무도 변모시킨다.


앞으로의 의사는:


AI가 제공한 데이터를 환자 맥락 속에서 해석하고 의사결정을 돕는 상담자가 되어야 하며

다학제 팀(간호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 등)과 함께 복합적 돌봄을 설계하는 조율자가 되어야 하며

생명 윤리, 환자 자율성, 질병의 사회적 함의 등을 판단하는 윤리적 중개자가 되어야 한다


의대 교육 역시 이에 맞춰 커뮤니케이션 능력, 공감 훈련, 다학제 협업, 윤리 교육, 데이터 리터러시 등을 강화해야 한다. 의사라는 직업은 AI의 발달로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복합적인 인간적 역할로 이행하며 오히려 재생산되는 중이다.


중국의 공대 집중 현상 – 국가 주도의 기술 편향과 그 함의


한국과는 대조적으로, 중국은 최근 이공계 중심의 국가 전략적 인재 집중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가오카오 (고등학교 입시) 상위권 수험생들이 베이징대, 칭화대 등 최상위 대학의 공대 쏠림이 압도적이며, 이후 대거 반도체, AI, 우주항공, 신에너지 등 전략 기술 분야로 진입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국가 주도의 기술 패권 전략에 따른 동원형 구조에 가깝다. R&D 투자, 장학금 유도, 창업 지원 등 전방위적 유인이 작동하는 한편, 공공의료, 인문사회 분야는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중국 모델은 산업 경쟁력 확보 측면에서 유효할 수 있으나, 동시에 다음과 같은 위험을 노정한다.


기술 편향적 인재 구조 → 사회 문제에 대한 종합적 사고력 결핍

인간과 사회를 해석하는 능력 약화 → 의료, 복지, 윤리, 문화의 통합 실패

정권 주도의 방향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 부족 → 지식 생태계의 폐쇄화


이는 기술과 사회가 불균형하게 성장할 때 발생하는 ‘고도 기술사회에서의 저성숙 인간문제’로 귀결될 수 있다. 한국 역시 이러한 편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는 어떤 인재를 필요로 하는가


의대 혹은 공대 쏠림 현상은 단지 특정 직업군에 대한 선호 문제가 아니라, ‘인재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의 협소함을 반영한다. 한국의 인재 선발과 육성은 지나치게 정량화, 서열화, 안정성 중심에 머물러 있으며, 복잡한 현실을 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전방위적 인재를 길러내는 데 실패하고 있다.


오늘날의 전방위적 인재는 다음의 역량을 갖춰야 한다.


지식 간 연결을 만들어내는 융합적 사고력

기술·제도·감정·윤리를 함께 설계하는 실행 지능

타인의 고통과 공동체적 책임에 반응하는 감수성


이러한 인재는 단일한 답을 잘 아는 자가 아니라,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고, 질문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자다. 그들은 좁은 의미의 ‘전문가’가 아니라, 사회 변화의 감각을 지닌 조율자이자 설계자다.


정책적·교육적 대안 – 인재가 흐르는 구조 만들기


현재의 쏠림을 완화하고 지식 생태계의 다양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 및 정책 차원의 구조적 개입이 필수적이다. 다음은 구체적인 방향들이다.


문이과 통합형 교육 강화: 과학기술과 인문사회 간의 위계가 아닌 상호 해석과 조율의 교육 체계로의 전환

진로 다변화 교육 시스템: 초중고에서 다양한 직업군을 체험하고 존중하는 문화 조성. ‘의사·변호사’만을 위한 입시 교육 탈피

사회적 인식 전환 캠페인: 의료, 법률, 기술 외의 다양한 공공 전문직(예: 사회복지사, 기후 전문가, 도시계획자 등)에 대한 존중 서사 강화

대학 입시 구조 개편: 수능 위주의 정량 평가에서 다양한 성향, 통합 역량, 공적 책임성을 반영할 수 있는 입학 체계 확립


지식 생태계의 다양성과 사회적 균형


의대 중심의 인재 편중은 경제적 불안, 사회적 인정욕구, 능력주의 서사의 복합 결과다. 중국의 공대 집중은 기술국가 전략의 일환이지만, 양자 모두 지식 생태계의 다양성과 사회적 균형이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편향을 내포한다.


AI 시대에 의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감수성과 해석능력을 요구하는 직업군으로 남게 된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의대 입시의 서열 구조를 넘어, 의사의 역할에 대한 윤리적·사회적 재정의가 병행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모든 분야로 인재가 자유롭게 흐르고, 각각의 분야에서 인간적 존엄을 실현할 수 있는 구조다. 정답을 말하는 존재가 아니라, 문제를 공동체적으로 해석하고 돌봄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를 키우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민주사회의 인재정책이 도달해야 할 방향이다.


* 참고하면 좋은 컨텐츠 - KBS 다큐 "인재전쟁"


이 다큐에 주제는 한국의 의대 쏠림 현상을 비판하고, 이공계 발전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가 필수적이다라는 내용입니다. 그 과정에서 중국의 사례를 긍정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글은 중국의 사례도 비단 좋지 않다는 비판의 시각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1부 - 공대에 미친 중국

https://youtu.be/yE9-ENNbXsU?si=RitwmjW2Cjn8xfpShttps://youtu.be/yE9-ENNbXsU?si=RitwmjW2Cjn8xfpS


2부 - 의대에 미친 한국

https://youtu.be/RbmAyBWJ-7w?si=xkoajxZEs_RHkPB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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