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감정처럼
따뜻한 말에 약하다. 단어보다 뉘앙스에 마음이 움직이고, 말 너머에 있는 온기에 감동받는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상냥하고, 부드럽고, 말 한마디로 마음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람.
현재의 나는 예민하다. 작은 말에 쉽게 동요한다. 저의를 감지하지만 모른 척한다. 일일이 반응하면 피곤해지니 참다 보면 터진다. 어른스러운 나는 대견해하고 애처럼 구는 나에겐 차갑다.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건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이 덜 엮여 있을수록 그런가 보다, 가 잘 된다. 나에겐 그랬구나, 한 마디도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왜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
사람들 말에 방향을 잃고, 남의 목소리에 길을 물으며 살았다. 정작 내 발목을 잡는 건 나였다. 내 기준대로 선택하고, 좋아하는 방식으로 관계 맺고, 감당할 수 있는 속도로 살고 싶어 노력했다.
철학적 삶이라니, 거창해서 수행이라고 한다. 남 탓을 멈추고 싶었다. “이 감정은 왜 올라올까?” 답을 찾으며 부딪히고 부서졌다. 칼릴 지브란은 말했다. 내 마음이 부서지지 않는다면 어찌 사랑할 수 있겠는가.
표현 못한 감정, 목에 걸린 말, 방관하는 나, 감정이 터지고서야 뭘 참았는지 알게 되는 등 말하기 전에는 생각도 안 나던 기억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나를 바라보는 게 마음 아픈데 신도 났다. 이만큼 수행했고, 이만큼 깨달았고, 이만큼 건강해졌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는 고민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나를 다시 의심하고, 이 길이 맞는지 두려워 멈춘다. 여전히 우당탕탕! 하는 모습에 자책하고, 자질이 부족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주춤거린다. ‘이만큼 잘한 나’를 내세우고 싶은 건 나를 더 이해해 달라는 고요로의 초대다.
영화 ‘웜바디스(Warm Bodies. 2013)’에서 주인공 R은 좀비다. 내면의 감정을 느끼고, 인간 삶의 소품을 모으며, 고독과 방향 감각 상실을 고민한다. R은 여주인공 줄리의 남자친구 뇌를 먹은 뒤 ‘진짜’ 감정을 경험한다. 줄리에게 다가가고 싶은 감정과 좀비 본능 사이에서 갈등하는 R에게 줄리는 경계심을 풀며 호기심으로 대하고, 공감하기 시작한다. 멈춘 감정이 흐르면서 R은 점점 생기가 돈다. 치유는 다른 좀비들의 감정 회복에도 영향을 미친다.
작은 나무망치로 싱잉볼을 두드린다. 둥-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소리의 끝에 닿는다. 그곳에서 거대한 고요가 기다린다.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싶어, 덤덤하게 그 속으로 들어간다. 살아있지만 흐르지 않는 피, 잊은 줄 알았지만 어딘가에 고여 있는 감정에게 다가가면 감정과 연결된 경락이 풀리면서 따뜻한 피가 번진다. 미소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