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수행 사이
대한민국은 산이 많다. 동네마다 뒷산 하나쯤 있다. 우리집 근처에는 영축산이 있다. 산길을 정비한다고 데크를 깔았지만, 나는 맨발로 좁은 흙길을 걷는다. 정상에 마련된 전망대가 있지만, 둘레둘레 걸어 마을과 어우러진 숲길 걷는 게 재밌다. ‘어디 산 갔다 왔다’는 말보다 어디 둘레길을 걸었는데, 이런 동네가 있었고, 이런 인심이 있었다, 고 말하는 게 좋다. 산에 왔으나 생활과 연결된 풍경이 마치, 수행의 본질 같다.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이 묻는다. 운동 뭐 하세요? 농담 섞어 ‘숨쉬기 운동’이요, 대답한다. 너무나 당연해서 ‘운동’이랄 수 없다. 명상은 ‘숨쉬기 운동’ 같다. 만보 걷기 하면서 운동 강도에 따라 변하는 숨 관찰하기, 자전거 타면서 숨이 안정되는 순간 움직임만 있는 상태, 가만히 숨을 타고 고요에 들어설 때, 스쿠버 다이빙하다 호흡과 나만 남을 때 등 경험의 순간이 있다. 모두 명상이 추구하는 안정 상태에 이른다.
수행을 삶이 아닌 영적 성찰하는 습관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명상’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명상을 주체로 삼고 몇 개월을 하루 9시간씩 가만히 나만 바라봤다. 혈관계, 신경계의 요란한 소리가 신체 감각으로 나타났다. 간질간질한 느낌, 솜이불 실밥 터지는 소리, 허벅지를 타고 오르는 아이셔 터지는 느낌, 꺼이꺼이 울고, 지쳐 쓰러졌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돈이야 조금 벌고 조금만 쓰지, 뭐.
선조들은 ‘등’산이 아닌 ‘입’산이라고 표현했다. 산은 성지이고, 품에 들어가 안기는 것으로 인식했다. 음양의 이치로 볼 때 등산과 명상은 닮았다. 루틴에 따라 목표를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 동적이고, 즉각적인 효과가 보이고, 회복이 빠르다. 반면 입산과 수행은 삶과 연결되어 있다. 품고, 감내한다. 맥락이 있다. 수행은 삶을 통틀어야 한다. 누구나 깨닫는 순간이 있다. 목적은 깨어남이다. 그 선상에 명상이 있다. 잭 콘필드 ⟪깨달음 이후 빨랫감⟫에 잘 표현돼 있다.
‘깨달음은 단지 시작일 뿐. 그것은 여행의 첫걸음이다. 깨달음 후에는 곧 분주한 삶 속으로 돌아가 여러 해를 살아야 한다. 그때에만 배운 것이 소화된다.’
경제적 궁핍은 ‘부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나를 초라하게 했다. 그동안 뭘 하고 산 거지? 수행 안 할 땐 경제적 풍요가 있었고, 수행 시작 후 정서적 안정감은 높아졌는데 왜 계속 두려울까? 생활력을 포기해야만 수행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내가 책임지고 싶은데…. 결국 나에게 명상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하는 두려움을 대면하지 않으려는 도피처였다. 취직하고 돈을 벌면 수행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쉬면서 수행하면 앞으로 먹고살 걱정을 했다. 그저 부족하다는 결핍 상태에 놓이기를 바란 것처럼.
산 정상에 올라 보는 경관은 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던 시각을 풀어준다. 보이지도 않는 저곳에 삶이 있구나. 정상에 올랐다는 환희보다, 잘 걸어왔다는 용기가 난다. 몸이 풀리고 숨이 고요해질 때, 삶도 그렇게 조금씩 이완된다. 불안과 두려움, 결핍과 수치심을 직면하며 삶에 이른다. 너무나 당연해서 ‘수행’이랄 게 없다. 깨어남은 도달점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그 자체다. 그러니 내 존재 하나 믿고 한 발짝씩 걸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