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게 ‘살고’ 있어?

아는 애야. 두려움

by Hildegart von Bingen

“행복해지고 싶어.”라고 말할 때 “어떻게 행복해지고 싶은데?” 물으면 “몰라, 그냥 행복해지고 싶어.”라는 대답을 듣는다. 뭘 해야 행복해지는 지도 모르면서 말로 세우는 망상은 행복의 조건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외부를 바라보는 동안은 보이는 것에 시선이 따라다니며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보여지는 것이 내 욕구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러니 제대로 채워질 리 없다.


마음공부를 한다고 바로 행복해지고, 계속 행복하고, 이런 거 없다. 다만 내 마음을 알면 어떤 부분이 마음에 안 들고, 어느 때 행복한지 관심이 생긴다. 그때 행복하고 싶으면 행복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면 된다. 불행하다고 느끼는 날은 그날대로 불행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행복하지 않은 부분도 받아들여야 비로소 행복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곧, 행복을 느끼는 날과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날은 공존한다.

수행을 하면 적어도 나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된다. 수많은 정보 가운데,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분류하다 보면 그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씨앗을 발견한다. 씨앗이 크는 동안 쨍한 날, 험한 날 다 겪는다. 그러니 행복해지려면 내 마음의 해, 달, 별, 구름, 비를 오는 대로, 가는 대로 경험해 주면 된다. 그리고 기억하는 거다. 아 그때 비가 많이 왔었지, 아 그때 볕이 참 좋았지, 아 그때 참 지랄 맞았지, 아 그때 별이 아름다웠지….


행복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마음공부가 유행이 되어 자리 잡았다. 마음의 위로가 되는 글을 읽고, 철학서를 찾고, 명상앱을 다운받는다. 요즘 마음공부 목적이 대승불교 쪽이라면 나는 소승불교 쪽이라고 봐야 할까? 행복하고 싶어서도 아니고, 마음의 평화를 찾아서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깨닫고 싶어서 수행의 길에 발 들였다. 그러니 속세와 점점 멀어지고, 속세를 버려야 깨달을 것 같고, 나에게 드는 인간적인 면들은 속세적인 것이라 기피했다. 내가 사는 세상 정리하고 저 산골 수행자만 모인 곳에 가서 도 닦다 죽으려고 했다. 다행히 도를 잘 닦아 이렇게 세상 귀한 줄 알고 속세에 몸을 푹 담가 ‘원효’의 땡중질에 경의를 표할 정도의 마음은 얻어 사는 중이다.


자주 죽는 생각을 하다 어느 책에서 죽으면 내가 완수 못한 인생 그대로 다시 살아야 한대서 ‘ㅆㅂ’(단전에서 나오는 욕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게 너무 두려웠다. 이렇게 또 살아야 한다고? 근데 또 어느 책에서 깨달으면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단다. 그래서 ‘깨달아야겠어!’ 하고 번쩍 든 생각으로 시작했다. 수년 동안 몸공부, 마음공부하며 깨달은 게 있다. 나 정말 행복하게 ‘살고’ 싶었구나.

닥친 순간에는 모르고 그냥 산다.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다. 우는 날 있다 보면 웃고 있는 날도 있다. 빨리 저놈을 차단해버리고 싶다가도 그 궁리하는 머리 아파 냅두면 어느 날은 또 예뻐 보인다.


우리는 모두 행복의 순간을 경험한다. 지나와서 다행이라며 한숨 돌려본 경험 다들 있지 않은가. 어떻게 견디나, 싶은 때가 있다. 10번은 반복돼야 깨닫는 사람, 10년은 걸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두려움이 올라올 때 지나가리란 걸 알아도 덮치는 통각은 어쩔 수 없다. 올라오고, 번지고, 사라지는 두려움 그대로 바라보고 견뎌줘야 한다. 시절 지나 보내고, 잘 살아왔네, 속으로 되뇔 때, 나를 향한 존경 비슷한 그 말에 행복이 담겨 있다.

대충 견디고 말았던 두려움이 있다. 밀물 밑 갯벌에 쏙 하고 숨었다가 썰물이 되면 다시 올라오곤 한다. 두렵지만 아는 애다. 친분이 쌓였으니 다음엔 덤덤해지려나.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그 순간을 해석하는 내가 개입되어 있듯이, 두려운 순간에는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는 내가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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