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진행형 대명사
생명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우주의 심장박동처럼 감각적으로 끌리곤 한다. 생명의 본질은 무엇일까?
김동률 앨범 4집 <토로(吐露)>에 ‘고별(告別)’이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 중에 ‘우리의 만남에도 생명이 있어’, 이 부분이 마음에 들어 예전 블로그 제목으로 오랫동안 사용했다.
<스타트랙 - 보이저호>에서는 우주에서 발견된 어떤 에너지장을 하나의 생명으로 보고 치유해 주는 장면이 있다. 그때 생명의 범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가이아 이론처럼 지구 자체의 유기적 생태계를 생명으로 볼 수도 있다. 시작과 끝을 지닌 관계와 유기적 순환에도 생명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만물 자체가 생명이 아닐까. 세상 자체가 유기적으로 전기장을 출렁거리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니 말이다.
고대 그리스어 ‘조에(zôé)’는 ‘생명’을 뜻하는 단어이다. 명사로 사용되었지만 ‘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생명이 존재를 나타내는 고유한 상태이면서도 그 뿌리는 활동에 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이 인간’, ‘저 인간’ 지칭할 수 있는 인간이 ‘이 인간이라는 진행형 삶 전체’, ‘저 인간이라는 삶 전체’라고 생각하면 한순간 찍힌 사진 한 장으로 한 사람을 판단할 수 있을까. 생명은 동사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중요한 건 ‘끊임없이’다. 끊기는 게 없다는 건 현재 모습이 이전 모습과 인연이 되고, 지금 모습이 다음 모습과 연결되는 인과 관계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언뜻 스치는 생각은 지금 이 순간은 지금으로 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어지는 게 아니라 명멸하는 것처럼, 삶의 신호를 빛으로 깜빡이는 동안 ‘명’과 ‘멸’ 사이의 공간이 인과로 보기에는 ‘끊임’이 있다. ‘끊임없음’으로 보이는 이유는 수많은 가능성이 교차하고 비껴가는 동사의 잔영이 ‘명’과 ‘멸’ 사이를 채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차원의 레벨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현실과 인식 사이, ‘착각’ 속에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살다’라는 동사를 ‘삶’이라는 명사로 만드는 이유는 나에게 주어진 순간 안에 담기에는 과정의 부피가 너무 커 담지 못해 함축할 뿐이다. 그러나 가끔 삶 자체를 상태로 착각하고 지금 이 순간이 내 전부인 것처럼 느껴져 좌절할 때가 있다. 이번 생이 전부인 것처럼 비교할 때가 있다. 생명은 삶이기도 하고, ‘살아가는 동안’이기도 하다. 생명은 순간인 동시에 영원한 진행형이다.
생명은 살아가는 방식과 매 순간을 대하는 태도가 스며든 기운이다. 되어가는 상태에서 생명은 유기체 일원으로 책임을 가져야 한다. 내가 선택할 부분은 수동태가 될 것인가, 능동태가 될 것인가다. 내가 모두 담기지 않은 곳에 멈춰서 나를 판단하며 재단하는 습성을 떨치고 싶다.
이보게, 나를 모두 담을 수 있는 그릇 만드는 걸 사명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