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선한 경험으로 만든 잼
특별한 뭔가를 집중적으로 공략해야 수행자의 삶이라고 생각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몇 시간 동안 가만히 호흡을 바라보고, 단전에서 기운을 느끼고, 임독맥으로 기를 돌리고, 긴 호흡을 하려고 노력했다. 눈으로 보이는 행동이 있어야 수행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먹는 것을 조절하고, 움직이고, 마음공부도 했다.
6~7년 전, ‘하이어셀프 워크숍’은 막연한 수행에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기운을 추상적으로 운행하는 수행관념에서 논리적이고 타당한 근거가 있는 수행법이 더해졌다. 나를 바라보려는 정적인 명상에서, 매 순간 내가 인식되는 동적인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때 ‘기억자아’라는 명칭은 몰랐지만, 워크숍을 통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내가 있다는 걸 명확히 인식한 뒤부터 ‘멈춰, 스토리 만드는 거야!’ 하며 지어내는 나를 멈추곤 했다. 나도 모르게 감정을 동원하거나, 핑계를 만들어내는 내가 인식될 때마다, 그동안 내가 나의 약함을 무기로 삼았다거나, 나에게 유리하게 잘 먹히는 패턴을 주로 사용한다는 걸 알았다. 예전과 그때, 그리고 지금 나의 차이는 예전에는 그러는 줄도 모르고 스토리를 만들어냈고, 그때는 이게 스토리구나, 이것도 스토리였구나,를 발견하는 기쁨과 나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면, 지금은 이 스토리는 어디에서 왔을까 궁금해서 더 깊은 나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그러다 김주환 교수의 ⟪내면소통⟫을 통해 ‘기억자아’가 중요한 명제처럼 요즘의 나에게 꽂혔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경험자아’가 현재의 경험을 인식하는 시간은 3초, 3초 후는 모두 과거의 기억을 인식하는 ‘기억자아’의 몫이라고 한다. 스토리텔러인 ‘기억자아’에 대해 생각하는데 왜 서정주의 시가 떠올랐을까.
신부(新婦) - 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경험 발생 직후 3초 후의 ‘기억자아’에 갇혀 오해로 보낸 세월이 내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떠난 남자야 그렇다 치지만, 한 자리에 첫날밤 그 모습 그대로 앉아 있는 모습에서 아프면서도 안타깝다. 처음엔 그냥 기다리다, 알 수 없는 슬픔도 느꼈다가, 결국 원망과 분노가 스스로를 태워 재가 되어 버렸다.
원망과 분노에 초점을 맞추는 이유는 존재를 거부당한 무력한 슬픔이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게 ‘기억자아’가 만들어내는 시나리오라는 걸 이제는 알아야 할 때다. 더 이상 무력한 나를, 약한 나를 방치할 수 없다.
‘기억자아’는 생과일을 가공해 유리병에 담은 잼과 같다.
경험자아가 현재를 생생하게 담은 신선한 제철 과일이라면, ‘기억자아’는 현재 경험을 재가공해서 더 오래 저장할 수 있도록 더 달게, 혹은 본질과 다른 특성을 만들어낸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기억자아’ 뿐이라면, 나는 어떤 잼을 만들 것인가. 경험 자체를 담을 수는 없지만 내가 담고 싶은 미래를 더 맛있게, 더 오래 저장하는 레시피를 개발한다면 삶 또한 다른 방식으로 즐길 수 있다. ‘기억자아’가 이야기나 꾸며대며 나를 갖고 노는 존재이기보다 신선한 현재 경험을 재가공해서 오래도록 필요한 영양을 어느 때든 공급해 주는 삶의 동반자로 인식함으로써 ‘기억자아’를 응원하는 입장이 되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