꿰뚫어 보다
아빠가 한 인간으로 느껴진 계기가 있다.
아빠는 평생 엄마가 갓 지은 아침밥을 드시고 출근했다. 살림은 주로 엄마 몫이었다. 어느 날 집에 들어가니 아빠가 다 드신 라면 냄비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인자하고 당당한 아빠가 왠지 초라해 보였다.
“어? 아빠가 주방에 왜 들어가?”
“엄마가 어디 가서….”
연민이 스치며 내가 자란 건가, 생각했다. 어색하고 낯선 듯한 아빠와, 그날 이후 서로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빠를 챙겨드려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중 ‘Not to be Reproduced’라는 작품이 있다.
우리말로는 ‘금지된 재현(1937)’으로 알려져 있다. 한 남자가 거울을 보고 있고(나는 그 남자의 뒤통수만 본다), 거울에 비친 모습도 이 남자의 뒷모습이다. 낯설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아 좋아하는 작품이다.
뒷모습은 재현되지 않은 나다. 감정을 포장하는 감각기관이 타인을 꾸며내는 동안 묵묵하게 진실을 축적하는 공간이다. 나는 제목을 통해 햄릿의 대사를 떠올린다. To be, or not to be….
햄릿의 대사로 비유하자면, To be reproduced or not to be reproduced. 재생산될 것이냐, 재생산되지 않을 것이냐. 구멍이 뚫리기 전 ‘혼돈’처럼, 그 작품은 원래 모습 그대로 Let it be! 나대로 살겠다는 의지의 재차 강조로 보인다.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이해하는 통찰력을 ‘꿰뚫어 봄’이라 하고, 주변 사람들을 되돌아보아 배려하고 이해하는 통찰력은 ‘되돌아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주변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고 바라보다 이해하는 통찰력은 ‘둘러봄’이라고 한다.’ - 김주환의 ⟪내면소통⟫
내가 이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안은 나도 누군가에게 뒷모습만 보여줄 수 있듯이, 나를 돌아보는 사색을 할 때 내면을 의식하는 시선은 내면의 뒷모습, 즉 속 모습을 꿰뚫어 본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뒷모습은 연민을 풍긴다. 감각기관이 사라진 ‘혼돈’의 세계에서 비로소 질서가 생긴다. 나를 꿰뚫는 연민의 시선으로, 기억을 둘러본다. 지금이라면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들이 쌓이고 무너진다.
360도 돌아가는 뒤통수 회전목마도 아니고, 엽기적이긴 하지만 초라해도 괜찮은 기분이 든다. 그로 인해 내가 아빠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듯이, 뒤통수를 애잔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살피고 계산하는 에너지를 놓아주게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