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평온
두려웠던 순간.
살면서 두려움을 느낀 순간은 많았다. 사는 게 두렵고, 부모님이 싸우면 두렵고, 시험 보기 전날 두렵고, 미래가 두려웠다. 많은 두려움 중에 순진한 두려움이 떠오른다.
중학교 2학년 때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길은 좁은 실개천이 흐른다. 같은 반 친구 집이 우리집과 가까운 실개천 근처다. 그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앞집인지, 그 집인지 여하튼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야자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실개천 작은 다리를 건너는데 그 남학생이 달려와서 내 자전거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편지를 준다. 나는 무서워서 얼른 집에 왔다. 편지에는 ‘나의 꽃 민에게’로 시작해 고백의 글이 있었다. 나는 그 편지를 읽으면서 이런 편지를 받은 나의 행실이 나쁜 것처럼 느껴져서 두려웠다. 다음날 작은 다리에 있는 그 남학생에게 편지를 돌려줬다. “이런 편지 주지 마세요.” 하고 다시는 그 길로 다니지 않았다. 그게 끝이었는데, 아직도 그 남학생 이름이 기억난다.
두려움이 현실을 만든다.
엄마가 학생이 남자 만나면 대학도 못 가고, 대학에 못 가면 술집 가서 몸을 팔아야 한다고 했다. 그 말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그때쯤 읽었던 시드니 셀던의 어느 소설 중 미미라는 주인공의 비극,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토머스 하디의 ⟪테스⟫ 등 기구한 여자들의 삶을 보며 여자로 산다는 건 이런 건가, 두려움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남자가 쫓아오면 내 삶이 망가질까 봐 두렵고, 남자가 와락 껴안은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악몽에 시달렸다. 엄마의 화법에 채색되어 대학에 들어간 뒤 반항이 시작되었다. 내 인생은 극단적인 두려움을 숨기기 위해 까만 크레용으로 박박 ‘엄마’를 덮어 칠하며 산 듯하다.
두려움의 근원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좋은 모습만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삶이 잘못될까 봐, 겁을 먹었나 보다. ‘이런 모습이어야 해’라는 기준은 내가 정한 게 아니니, 이젠 나에게 맞는 삶을 살면 되는데, 나를 잃은 느낌이 들곤 했다. 뭐가 나에게 맞는 삶인지 지금도 고민한다.
생존하라. 그리고 실존하라.
내 생이 나아가는 방향 곳곳에서 나는 살아라, 라는 메시지를 들었다. 살아낸 사람들을 보고, 살려는 사람들을 보면 감동할 정도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에게도 잘했다, 잘 살고 있다, 말해주곤 한다.
김주환 ⟪내면 소통⟫ 첫 페이지에 이런 말이 나온다.
‘몸과 마음의 모든 병은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회복탄력성은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나 집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온다. 천천히 호흡하면서 고개 한번 돌려 나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텅 빈 평온함과 온전한 자유가 있다.’
살 만해졌다고 놓고 있던 기억과 왜곡의 뿌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왜 처음 수행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남자가 내 인생에 큰 과제였다는 걸 알게 된 과정 등 수많은 실패와 깨달음의 순간을 기록하며, 나를 잃은 느낌이 정리를 통해 또렷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