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하는 ID

나에게 부여하는 정체성

by Hildegart von Bingen

김주환 ⟪내면소통⟫ 중에서

뇌는 생존하기 위해 세상을 왜곡한다.

뇌의 인지작용은 세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세상을 적절히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뇌의 핵심 기능은 세상을 ‘왜곡’하는 것이다.

‘왜곡’은 뇌가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전달되는 여러 가지 감각정보에 나름의 의미부여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부여가 언어를 기반으로 이뤄지는 것이 스토리텔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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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혹은 닉네임, ‘나에 관한 어떤 것’.

pooh, 아이가 곰돌이 푸우를 좋아해서 즉흥적으로 지은 첫 ID. 여전히 대부분의 ID 앞부분에 사용되고 있다. 의미는 없다.


skfdmsmsto, ‘날으는새’ 영문 키보드 버전. 좋아하는 화가 김환기의 그림 제목이다. 맞춤법에 맞는 ‘나는 새’보다 ‘날으는 새’는 대상의 의지와 주체의 의도가 만나 시너지를 이루어 비상하는 느낌이 들었다.


목수의아내, ⟪목수일기⟫ 책의 저자인 목수 김씨가 체리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마당에 나무를 심고, 늦봄, 체리를 따려고 담장에 오른 이야기를 읽고, 이런 남자의 아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닉네임으로 사용할 때 예수님 직업이 목수라서 목수의 아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다. 어쨌든 ‘아내’로 불리는 동안 참 조신했다.


Stella, 단테의 신곡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의 마지막은 모두 별, Stelle, stella, 별로 끝난다. 빛을 내는 존재이며, 죽기 직전에도 절정에 이른 빛을 내 어느 때보다 빛나면서도 어느 때보다 응축된 어둠으로 변환하는 별, 나도 빛나고 싶었다. 임시 영어 이름으로 사용했다. 마침 오페라 ⟪호프만이야기⟫에서 호프만의 뮤즈인 스텔라의 차가움과 도도함이 매력으로 느껴져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차가워 보인다는 말이 좋았다. 거칠던 시절이다.


Hildegart von Bingen, 수녀 힐데가르트폰빙엔을 닮고 싶은 마음으로. 영적 삶을 동경했다. 이 닉네임을 사용하고 난 뒤 어느 날 리얼 수행을 하게 되었다.


관우(觀雨), 자연의 순환이 물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에, 물의 흐름, 곧 생명의 흐름을 살핀다는 의미로 요즘 사용 중이다. 가끔 이름이 되기도 한다. 신나는 게 사라졌다.


꽂히는 것들에 부여하는 ‘나’의 이미지.

제주 하면 떠오르는 한라산. 그러나 제주의 정체성이 한라산만 있는 건 아니다. 한라산으로 대표할 수 있지만 한라산이 만들어진 배경과 함께한 수많은 오름이 있다. 제주의 오름은 주변의 마을이나 지형에 어울리며 각기 다른 특성을 지닌다.


정체성이 단일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중적이라는 말은 욕처럼 들렸다. 정체성을 찾고 싶어 방황하며 다혈질, 다양성을 지닌 나를 하나의 특성으로 정의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변화에 따라 정체성은 뒤섞이고 시기마다 취미가 달라져 활동 환경이 달려졌다. 모임에서 바꾼 닉네임으로 불리다 보면 그런 모습을 닮는다. 스토리텔링 성공.

그렇다고 왜곡된 삶을 살았을까? 자신을 내부로부터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면, 일시적 정체성은 결국 본성을 반영하게 된다고 한다. 중요한 건 긍정적인 중심 가치다. 중심으로 걸어들어 갈수록 어떤 스토리를 입히고 살았는지 알게 된다. 그 시절을 이해하고 하나씩 놓아주는 방생, 항복 자체가 긍정이며, 가치의 발견인 듯하다.


한라산과 오름은 본질은 같으나 발현된 특성이 각자 또렷하다. 모두 제주를 이루는 요소이다. 나 비록 기복 있고, 극단적이며, 즉흥적이고, 집요하지만, 본질은 따뜻함이니, 회의를 멈추고 방생의 은총이 우주만큼 멀고도 가까운 나에게 닿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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