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에서 수용으로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정 들이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
정선아리랑 마지막 구절이다. 나윤선이 부르는 아리랑은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 가나’여서 정든 님 떠날 때의 슬픔과는 다른 ‘날 버린’ 것에 대한 원망이 생길 법한 구절이다.
저 산에 지는 해를 바라볼 때, 본능적으로 그 빛을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싶어진다. 빛이 서쪽으로 비스듬히 누울 때 어둠과 빛이 중첩된 노을이 짙어질수록 마음속에 그리움이 차오른다. 그렇다고 해를 원망한 적 있었던가. 아파하며 고통스러워했던가.
해는 때가 되면 기울고 사라진다. ‘날 버리고 가시는 님’ 역시 그렇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인연이 다해서 가려는 에너지를 붙잡아둘 수 없다. ‘왜 떠나나’에서 ‘때가 되었구나’로, 움켜쥐고 있던 손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놓아줌은 건 곧 살려함이다. 내가 흘려보낸 에너지가 다른 형태로 돌아오게 하는 가장 부드러운 방식이다.
이러한 놓아줌은 근원의 에너지를 인정하는 태도다. 근원의 에너지는 우리가 붙잡거나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흐르고 있는 생명의 원천이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사람이 떠나는 것까지, 모두 그 근원에서 흘러나온 움직임이다. 붙잡으려고 애쓸 때보다 놔주고 나서 마음이 편해지곤 했으니 그 에너지는 나를 포함해 모두를 살리는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억지로 바꾸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여기서 애착과 집착의 차이가 드러난다. 새가 날아와 나무에 앉는다. 나무는 그늘이 되어 준다. 바람이 불어 새가 떠나도 나무는 그 자리에 남는다. 언젠가 바람이 잠잠해지면 다시 돌아올 테니까. 애착은 마음이 어떤 사람이나 사물, 가치와 건강하게 연결되어 안정을 느끼는 상태다. 함께 있을 때 기쁘지만 떠나더라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다. 반면 집착은 떠날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 커질수록 잃지 않으려는 통제 욕구가 강해져 새를 새장에 가둔다.
칼릴 지브란은 사랑과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가 떠나가게 놓아 줘라.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 사람은 언제나 당신 것이었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는 처음부터 당신 것이 아니었다.”
놓아준다는 건 곧 살리려는 흐름에 관한 앎이다. 근원을 인정하고, 리듬에 나를 맡기는 삶의 춤이다. 바람을 터주듯 길을 열어줄 때, 흐름은 다시 살아나고, 떠남조차도 새로운 만남을 위한 한 장면이 된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이려니 하면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