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

by space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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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초년병 시절의 일이다.

사과밭에 물을 주기 위해 관수호스에 연결되어 있는 모터를 켜고 나서 무심코 서있는데 순간적으로 뭔가가 머리에 스친다.

으악!!! 밸브...

그때 아마 밸브가 위치한 곳으로 뛰어가는 나의 속도는 광속에 가까웠을 것이다.

다행히 관수호스는 터지지 않고 넘어갔지만 가끔 밭에서 밸브가 있는 곳을 지나칠 때면 그때 생각이 난다.

사과밭의 관수 밸브는 물이 부족할 경우에 대비하여 4등분으로 나누어 줄 수 있도록 밸브가 달려 있다.

관수 모터를 돌릴 때는 적어도 그중의 하나는 미리 열어 두어야 하는데 그때는 네 개 모두를 꽉꽉 잠가 놓고 있었다.

강력한 모터의 힘으로 돌리는 물은 조금이라도 늦게 밸브를 열었으면 갈 곳이 없어 결국 호스를 터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사과밭 골골이 연결되어 있는 관수호스를 보다 보면 사람의 순환계와 닮았다.

순환이라는 것은 막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말하리라.

돌고 돌 것은 느리고 빠르고 가 없이 일정하게 순환을 하여야 하고 한쪽으로 흘러 나가야 할 것은 주기적으로 그래야만 한다.

우리도 인생이란 것을 살아가며 몸으로 때로는 마음으로 모터를 돌려 삶에 필요한 동력을 얻는다.

모터는 돌아 가도 몸의 혈관이나 신경계나 소화기 같은 순환계에서 그 흐름을 방해할 것들이 생기면 탈이 생기고 몸과 마음에 이상 징후가 오기 시작한다.


어느 해인가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열자'를 떠올렸다.

신체적으로도 몸의 순환이 닫히지 않도록 하는 것과 함께 생각의 반경도 내 안에 가두지 말았으면 했다.

내 삶에 던져지는 것들에 대해 내가 받아들일 것은 내 안으로 넣어 선순환되도록 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쌓아두지 말고 잘 흘려보낼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의 저장공간은 생각보다 크지 않기에 그 양이 감당이 되지 않으면 결국 어딘가로는 출구를 찾게 되어 있다.

출구를 찾지 못하면 변형되거나 변질되어 다른 창고를 돌아다니지만 그렇게 쌓여 있을 수 있는 것은 시기의 문제이지 결국 부패하거나 그릇된 출구로 나오고 만다.

사랑이란 것도 두 사람 간의 순환이 좋지 않으면 집착이나 무관심의 출구를 찾아 종종 변형, 변질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무인도에 살지 않는 한 어쩔 수 없이 내 안의 순환으로 끝이 나지 않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내 안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으로 문을 연다는 것이고 그러면 결국 나 아닌 '너'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거기서부터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로의 순환이 시작된다.

가끔 서울에 올라가 지하철에 앉아서 건너편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게 된다.

우리가 같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참 서로 다르게 생겼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안에 갇혀 있다 보면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겠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살아오며 확인해 왔다.

나와 다르게 생기고 다르게 생각하는 '너'가 실은 마주하여야 할 세상이다.

'너'와 '내'가 주고받는 순환을 멈추게 되면 '너'는 너일 수 없고 '나'는 나일 수 없다.

서로는 한낱 대상이 되어 물건으로 전락하거나 주인의 마음에 따라 사랑받기도, 방치되기도 하는 애완견 신세가 되고 만다. 서로에게 순환되지 못하는 사랑도 실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돈의 흐름이 한 곳에만 몰려 있고 다른 곳은 비어 있다면 세상의 순환은 덜거덕거리고

자본주의 깃발 아래 잘 살아보자고 모인 세상은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방치되는 이들이 늘어 난다.

사과밭의 관수호스도 물이 한 곳에만 몰려 압력이 고르지 못하면 낮은 곳은 물이 넘치게 나오고

높은 곳이나 골의 끝부분에 있는 사과나무는 물을 받아먹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밸브를 열어 본다.

천천히 연다.

밸브를 갑자기 전부를 열어 버리면 급격한 압력 변화로 탈이 생길 수가 있다.

우리도 삶의 동력인 모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동해 버릇했기에 하루아침에 다 열 수는 없다.

하지만

언젠가는 밸브를 활짝 열어 볼 참이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흐를 수 있도록.


사과밭에 물 줄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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