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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우주 Aug 02. 2020

#1 - 게임회사 첫 출근, 그 이후

얻기 위해 덜어내야 할 것들

 게임회사로 첫 출근 하는 날, 나는 집에서 일찍 나와 회사 근처의 스타벅스에 들렸다. 첫 출근을 앞두고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내가 다짐했던 것들을 되뇌기 위해서였다.


과거의 내 경력들을 뒤로하고 게임회사에서 일하기로 결심했을 때, 다짐했던 것들이 있다. '과거의 일 좀 하는 나는 더 이상 없다는 걸 자각할 것', '나이에 연연하지 말 것', '항상 배우려고 할 것'. 사실 이것들은 '일 좀 하는 경력 사원'에서 '나이 든 중고 신입'의 처지가 되면서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기에 기꺼이 받아 드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첫 출근을 하고 내가 담당하게 될 프로젝트의 기획자나 QA, PM, PD 등 기술영업 경력자인 내겐 다소 생소한 직함을 단 사람들과 마주 보고 어색한 인사를 마무리할 때 즈음, 조금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었다. '다들 너무 어려 보이는 데, 이 사람들이 정말 몇 백억의 프로젝트를 책임지는 사람들인가?'


그도 그럴 것이, 과거에 내가 몸 담았던 업계에서는 수백억이 아닌 수억의 프로젝트라고 해도 총책임자를 비롯해 해외 본사의 담당자들까지 딱 봐도 최소 업계 10년 이상은 되는, 연식(ㅎㅎ)이 꽤 되어 보이는 사람들로 꾸려졌기 때문이다


겉모습이나 나이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자부하는 내가(나도 동안이라 사회 초년생 때부터 곧잘 무시당하는 경험을 했기에) 이런 생각을 했던 건, 아마도 과거 업계에서 물든 색이 아직 다 빠지기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임회사로 출근하는데 캐주얼 느낌의 정장 차림에 구두를 신고 갔으니... (게임 업계에서 일한다고 꼭 반바지, 반팔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나와 같은 복장을 한 사람은 100명 중 한 명도 없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과거 업계의 사고방식은 물론, 그 시절의 내 모습조차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사실 나에게 '나이에 연연하지 말자'는 다짐은 '내가 나이가 많다고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자존심 세우지 말자'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같잖은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이었으면 안주하는 쪽을 택했지, 새로운 업계에 도전할 생각은 절대 안 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내가 나이가 많다고 나보다 어린 담당자에게 의기소침해지지 말자'였다. 그래서 처음엔 '이 사람들이 이 정도의 규모를 책임지는 사람들이라고?' 놀라워했다면, 나중에는 '나보다 젊고, 더 많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과연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로 바뀌어 있었다. 문제는 이 생각의 기준이 순전히 내 과거 업계에서의 경험과 인식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전임자나 여느 신입 사원들보다 더 노력하고자 애썼다. 그래서 당장 직접적으로 업무와는 상관없지만 게임 사업 관련 용어를 외우기도 했고, 사업부 소속임에도 혼자서 자발적으로 개발자 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코로나로 인해 회의가 없어지고 난 뒤에는, 그들에게 방해가 될까 봐 못 가고 있지만) 하지만 첫 출근 후 한동안은 주눅 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심리적인 상태는 도전하고자 하는 내 의욕을 조금씩 갈아먹고 있었다.


 내가 주눅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분명 '과거의 사고방식을 가진 나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이 아닌 내가 과거의 사고방식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고 있었다. 그런 인식은 알아서 옅어지는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과거의 사고방식을 가진 '나.txt'라는 파일을 새로운 내용의 '나.txt'로 간단하게 덮어쓰기를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덮어쓰기 되는 것은 아니었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그리고 직접 휴지통에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기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함을 느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찾아온 설 연휴는, 과거 업계에서의 사고방식에 사로 잡혀 있는 마음을 어느 정도 덜어낼 수 있게 해 줬다. 덕분에 다시 출근했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주눅 드는 게 줄어 드니, 내가 노력하는 만큼 일의 능률도 좋아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과거의 사회 경험이 게임 업계에서 적응하는 데에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도 사회 경험이 전혀 없는 신입들보다는 더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분명 '일을 하는 것'은 그럴 수 있겠지만, 과거의 경험이 '새로운 질서와 사고방식을 받아 드린다는 것'에 있어서는 핸디캡이 될 수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 '머리가 굳는다'고 하나보다.


나는 지금도 과거의 나를 조금씩 덜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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