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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만화가 Oct 26. 2024

400년 후의 너에게 (5)

돌이켜보면, '케틀렌치'에서 보냈던 그 6개월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나는 무언가에서 멀어지는 중이었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만약 내가 6개월만 일찍 사고를 당했더라면, 좀 더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이라고.


이따금 술기운이 오르면, K는 내게 선희 씨를 제외하고는 그리운 것이 없는지 묻는다.


“글쎄요…”


나는 말 끝을 흐리며, 솔직히 터놓고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척’을 한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선희에 대한 생각이 너무 진해서, 다른 것들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무엇을 그리워해야 할까?


내 고향 함병리의 사람들?

나는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경남 함병리에 있는 작은 연지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버려진 세단 안에 5만 원짜리 몇 장과 함께 놓여 있는 나를 낚시터를 경영하는 이장님이 발견해 주었다. 나는 그곳에서 자랐다. 낚시터 일을 돕기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운구를 하거나 상여를 지면서 자랐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모아둔 돈을 들고 서울로 도망쳤다.


짧았던 서울살이?

나는 그나마 월세가 저렴하다는 신림동 옥탑에 방을 얻었다. 화장실과 브라운관 TV가 딸려 있는 제법 번듯한 방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세를 메꿨다. 옥탑방의 오전을 채우던 버스 차고지의 매연. 술에 취해 흐느끼는 사람들의 울음소리. TV에서 끝없이 반복되던 최신 가요의 뮤직비디오. 라면. 또 라면. 그리고 다른 브랜드의 라면.


'케틀렌치'에서의 생활은 어떤가?

여기는 제법 그리워할 만한 것들이 있다. 요리에도, 서빙에도 재능이 없던 나를 꾸준히 써주었던 사장님. 덕분에 제법 사람 구실을 하며 식당의 잡무를 할 수 있었다. 벽에 붙어 있는 가짜 사슴과 족제비 박제들. 떡갈비 용 석쇠 위에 올려져 대접되던 스테이크. 처음 직접 내려서 마셔본 커피. 만약 선희와의 만남이 없었더라면, 나는 '케틀렌치'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했으리라. 그리고 K에게 그때 사장님의 추천으로 취미를 붙이게 된 오래된 B급 영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내가 매일 아침 반복적으로 마시고 있는 기묘한 맛의 영양제처럼 인상적인 기억일 뿐, 추억이라 할 수 없었다. 무한히 반복해서 살고 싶은 경험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거운 찻잎이 가라앉듯이 몸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는 오로지 선희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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